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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작가 Aug 04. 2023

가출, 혹은 여행기

글 못쓰는 림작가, 대전에서 방황하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12시 10분 전이었다. 예매한 기차가 한시 출발이라 시간은 넉넉했다. 

공항철도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길고 가파른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며 천천히 점심이나 먹자 생각 했다. 근데  웬걸. 서울역에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로비는 물론이고 맥도날드, 롯데리아, 웬만한 까페까지 주문하려는 사람들이 가게 밖까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점심시간이라지만... 휴가철이라 모두들 떠나는구나 싶었다. 

아침을 먹지 않아 기다릴 기운이 없었다. 서울역 코너에 있는 작은 김밥집이 생각났다. 예전에 드라마를 기획하는 피디님과 마산에 가는 길에 김밥을 포장해 사갔던 가게다. 그런데 그쪽도 붐비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서 먹을 자리도 없어서 다시 서울역을 돌았다. 위층에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도 있었지만 이미 시간은 12시 30분에 가까워지고 있어서 여유로운 식사는 불가능했다. 가볍게 때우기엔 역시 김밥인가. 다시 김밥집으로 돌아가는 수 밖에. 

먹을 자린 없지만 포장은 된단다. 달랑 김밥 한 줄에 편의점 생수를 들고 열차를 기다린다. 이번에는 대전에 갈 때면 늘 타던 ktx가 아니라 무궁화호다. 바쁜 일도 없고 큰 목적도 없는 여행이라 경비라도 줄이자 싶었다. 몇 년 만에 타는 무궁화호인가. 김밥을 들고 열차에 올랐다. 

무궁화호는 고속철도보다 차량은 적지만 한 차량에 든 좌석수는 많다. 통로와 좌석사이도 넓은 편이다. 사실 기차여행을 즐기려면 무궁화호가 더 나을 수 있다. 다만 단점도 있다. 특히 냄새, 무궁화호는 특유의 오래되고 낡은 냄새가 난다. 곰팡이 냄새 같기도 하고 오래된 소변 냄새 같기도 한.... 무궁화호를 타지 않아도 맡아본 적 있을 만한 냄새. 장마철 구도심의 지하상가나 오래된 극장에서도 비슷한 냄새가 난다. 종로3가 뒷골목 거리에서도 느껴지는 냄새....시간의 냄새인걸까. 영화 <기생충>에서 박사장이 혐오한 냄새이기도 하다. 하층의 냄새. 오래된 것들은 새것들에 비해 하층일 수 밖에 없다. 

좌석을 찾고보니 옆자리에는 대학생 쯤으로 보이는 청년이 앉아있다. 마르고 길쭉한데다 위 아래 모두 검음 옷을 입은 모습이 영락없이 초6 아들 지호를 닮았다. 사춘기에 들어선 아들은 어린 시절 몸을 위 아래로 쭉 늘린듯 엿가락같이 길어진데다 검은 옷만 매일 입는다. 재작년만 해도 어린이의 모습이었는데, 갑자기 다른 아이가 되었다. 

청년은 퉁퉁한 배낭을 든 40대 아줌마가 옆자리에 앉으니 사뭇 긴장한다. 귀에 꽂은 이어폰을 매만지며 슬쩍 눈치를 본다. 어쩐지 웃음이 난다. 갑자기 열차가 안락하게 느껴진다. 꼭 아들과 같이 기차를 탄 것 만 같다.

주섬주섬 김밥을 꺼내 먹는다. 세로로 들고 호일을 돌돌 풀어가며 하나씩 빼먹는다. 옆에 앉은 학생이 불편해할까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씹는다. 위장이 비로소 안도한다. 절로 한숨이 나온다. 출발 전에 김밥을 해치우고 쓰레기까지 말끔히 치웠다. 이제 좌석에 몸을 기대고 어디로든 실어가도록 힘을 빼본다.

아침에 비염약을 먹어서지 자꾸 잠이 온다. 잠깐 졸았다가 기차 방송소리에 깬다. 수원역이다. 옆자리 청년이 내리려는 제스처를 해 보인다. 후다닥 다리를 틀어 나갈 공간을 만들어준다. 금방 내리는 구나. 한마디도 나누지 못했네. 속으로 섭섭하다. 

수원역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또 오른다. 내 옆자리는 듬직해 보이는 남자가 채웠다. 짐을 많이 들었다. 나보다 멀리 가는 것 같다.


최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일하면서 놀 생각, 놀면서 일할 생각하는 소모적인 버릇은 이제 버려야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자. 하지만 어떻게 해야 생각을 멈출수 있을까. 또 나는 뭔가를 생각하고 뭔가를 적고 있다. 

지호를 낳은 해에는 새벽마다 잠을 설쳤다. 새벽에 잠이 깨면 글이 쓰고 싶었다. 쓰고 싶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쓰고 싶다는 욕구가 먼저였다. 그 때 글로 풀어내고 싶은 것은 돌아가신 ‘이모’에 대해서 였다. 이모에 대한 기억과 생각을 남기고 싶었다. 이번이도 잡생각을 말자 라고 다짐하자마자 다시 이모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진짜 내 글의 시작은 '이모'를 빼고는 쓸 수 없는 것 같다. 어쩌면 내 슬럼프를 극복할 단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직 그런 기대는 접어두자. 그저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왔기에.... 처음에 다짐했던, 완성하지 못한 미션을 풀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전역에 도착했다. 대전역에서 걸어 이동할 수 있는 소제동 철도관사촌 카페거리에 가는 것이 첫 번째 계획이다. 

소제동은 대전의 구도심 근방으로 아주 오래된 기억 같은 곳이다. 부모님이 나를 낳아 기른 첫 동네이며 초등학교에 가기 전까지 살았고, 후에 이사를 갔지만 할머니와 큰 고모가 사시던 동네라 자주 다녔던, 그냥 또 다른 우리 집이었다. 당시에도 낙후된 곳이었는데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다. 재개발 소문이 몇 차례 돌았지만 진전은 없었고 이제는 영영 물 건너간 걸로 보인다. 소제동 카페거리도 재개발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레트로 열풍에 힘입어 조성 된 것 같다. 대전역 바로 뒤편 높은 건물들과 완전히 구별되는 오래된 개천가에 구옥을 활용한 아기자기한 카페들. 실제로 가보니 생각만큼 잘 조성되어 있지도 않고 만들다 만 느낌이어서 오래된 것에 대한 가벼운 연민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이 자그마한 관심을 이용해 재개발 붐을 일으켜보려는 세력이 있는지 까만 바탕에 붉은 글씨로 관사골목 철거를 외치는 플랜카드가 사뭇 살벌했다.


 

  소제동 카페 거리 골목길
소제동 카페거리 골목길에 위치한 카페들


카페 <화양연화>



넓은 지역도 아닌데 날이 날인지라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장마가 끝나고 더위가 세상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골목길을 몇 차례 뱅뱅 돌다 결국 처음에 괜찮게 보고 지나친 카페로 들어갔다. 화양연화라는 이름이 마음에 든다. 일본식 구옥을 멋스럽게 고쳤다. 꽤 분위기가 있다. 특히 동그란 모양의 창을 통해 밖을 보니 여름하늘과 개천길이 수채화처럼 예쁘다. 땀을 식히고 카페인 보충도 마쳤으니 다시 길을 나서본다. 이번에도 옛 기억을 따라서.









다시 대전역으로 돌아와 지하철을 탄다. 대전역에서 내리면 늘 신시가지 정부청사쪽으로 향했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반대 방향, 판암역으로 향했다. 판암동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나는 우리 남매들 중 유일하게 판암초등학교(그 땐 국민학교) 졸업생이다. 판암역에서 내려 먼저 초등학교로 향한다. 역에서 아주 가깝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살던 때는 대전에 지하철이 없었다. 판암동만 없었던 게 아니라 대전 전체에 지하철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새 정말 많이 변했다 싶다. 하긴 이미 30년 가까이가 흘렀으니.


판암초등학교

판암초등학교는 내 기억 속 모습이 아니었다. 그 때는 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넓은 운동장이 보이고 왼쪽에 학교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입구부터 바로 건물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운동장은 뒤 쪽에 있는 건지 어쩐 건지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외부인 출입이 금지되어 자세히 볼수도 없다. 꽤 넓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운동장, 그 운동장을 두르고 있던 아름드리 플레타너스가 생각난다. 그 커다란 나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름마다 송충이를 떨궈 아이들에게 시원한 그늘 뿐 아니라 짜릿한 긴장감을 선사한 나무들... 가려진 운동장에 잘 버티고 있다고 믿고 싶다.




예전에는 우리 가족이 살던 아파트가 바로 학교 앞인지 몰랐다. 근데 보니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바로 앞 동이었다. 판암동 주공아파트 202동. 근데 왜 그렇게 등교 길이 멀게 느껴졌었지? 지각하면 운동장 쓰레기 줍기 벌칙이 있어 늘 헐레벌떡 뛰어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판암 주공아파트

살았던 아파트, 처음으로 믹스커피를 뽑아 마셔보았던 상가건물을 보고 있자니 옛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한화 이글스, 예전엔 빙그레였던 야구선수가 같은 동에 살았다. 그래서 아파트 앞에 빙그레 야구팀 버스가 한 번씩 서있었던 기억이 난다. 앞 동에 화재가 나서 밤새 화재 진압을 구경했던 기억도 난다. 한 달에 한번쯤 있었던 해충방역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정자에 모여 이웃들과 고구마를 먹었던 기억. 도서대여 버스가 우리 아파트 앞에 섰었지. 그곳에서 베르사유의 장미를 빌려 봤었다. 정기적으로 오던 우체국 버스도 기억난다. 기념우표를 많이 샀는데, 그 땐 우표수집도 참 열심히 했다.

많은 기억 중에서도 꼭 한번 확인해보고 싶은 기억이 있다. 6학년 사춘기를 막 맞이한 친구들과 아지트로 삼았던 언덕, 아파트 뒤 철로가 보이는 언덕이 아직도 있을지 궁금했다. 여름이면 누가 심었는지 모를 호박이 자라고 가을이면 온통 갈대가 자라 흐느적거리던 그곳. 거기서 천방지축 4인방은 호박서리도 하고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손도 흔들었다. 갈대가 흔들릴 땐 감수성이 흘러 넘쳐 들고 다니던 하이틴 소설을 큰 소리로 읽곤 했다. 소중했던 친구들. 정다운, 김지연, 김연민. 우리 사인방은 6학년 1년을 그렇게 꼭 붙어다녔다. 하지만 중학교에 가면서(나는 서울로 전학을 가게 되었으므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 때 그 친구들과 지금까지 연락을 했더라면 내 인생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렇게 상념에 잠겨 기억 속 언덕을 찾았는데.... 없었다. 남아있지 않았다. 분명 그 자리인데, 그곳에는 집들이 지어졌고 철길가에는 높다란 방음벽이 생겼다. 아파트와 철길 사이 그 작은 언덕이 낡은 집들과 작은 텃밭들, 그리고 가로막힌 방음벽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 시절 우리의 모습처럼 기억조차 어렵게 변해버렸다. 너무 늦게 찾아온 것일까.


씁쓸한 발걸음을 돌리다 검은색 고양이 한 마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잔뜩 긴장하고 내 눈치를 보며 도망갈까 말까 고민하는 녀석을 보니 웃음이 난다. 그래 이제 이곳은 네 공간이구나. 너 다 해라. 난 추억이 있으니 충분하다. 녀석이 지나가게 길을 비켜준다.



한 30분 정도 둘러봤을 뿐인데 또 다시 땀범벅이다. 다시 판암역으로 돌아왔다. 바로 화장실로 향한다. 찬 물로 붉어진 얼굴을 진정시킨다.

시간은 7시를 향하고 있었다. 이제 배도 고프고 피곤하다. 좀 쉬어야겠다.

오늘 잠자리는 유성온천 불가마 찜질방으로 정했다. 한 달에 한번정도 대전에 올 일이 있었지만 한 번 가야지 하면서도 못가 본 곳이다. 오늘 드디어 간다. 


그냥 있어도 땀이 쭉쭉 나는 더운 날에 무슨 찜질인가 싶지만 찜질방은 더위에 지친 몸을 뉘기에 적당히 시원하고 온천수 목욕은 몸을 나릇하게 풀어주었다. 남편에게 보고를 해야지. 어제 갑자기 혼자 여행을 가겠다는 통보에 속으로 걱정만 태산이었을 그다. 핸드폰을 통해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내 고민은 나의 것인데 늘 자기가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자책하는 남자. 근데 난 그래서 오히려 마음을 털어놓기가 어렵다. 부담이 되고 싶지 않다. 가족이라면 사랑하는 사이라면 서로에게 기대야 하겠지만 지금까지도 너무 많이 기대온 것 같아서, 자꾸 마음이 약해질 거 같아서 거리를 두게 된다. 섭섭해 할 것을 알면서도.... 사람 마음이란 게 참 복잡하다.

11시가 지나자 사람들이 잠잘 자리를 찾아 들기 시작했다. 나도 여자방에 들어가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잠이 오지 않아 이렇게 여행일기를 쓴다. 하루가 저물어간다. 가족 없이 혼자 집 밖에서 밤을 보낸 적이 언제였나?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아마 결혼하고 처음 같다. 결혼 전에 혼자 살았고 혼자 여행도 다녔고 거리낌 없이 여러 가지를 했던거 같은데, 가족이 생긴 후엔 혼자 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어느새 의존적 인간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머물러있고 싶지 않다. 이번 여행을 마치면 이젠 더 이상 겁내지 않겠다고 다짐 해본다.

새벽 1시까지 시간을 확인한 기억이 있고 어느새 잠이 들어 새벽에 두 세 번 뒤척이긴 했지만 나름 푹 잤다. 아침 7시에 일어나 남편에게 모닝콜을 하고(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 8시까지 다시 자고 일어났다. 어제 찜질방 요가 클라스를 들으며 흘린 땀을 아침 온천수에 닦아내고 뜨뜻한 탕에 몸을 담갔다. 저절로 다시 잠이 몰려와 노곤해진다. 이러다 이대로 온천에 눌러 붙을 거 같아 찬물로 몸을 씻고 나간다. 아침일정은 수영이다.




남선공원 체육관으로 갔다. 여름방학을 맞아 이 곳 수영장에 파도풀을 열었단다. 저렴한 가격에 놀 수 있다고 해서 와봤다. 

역시나 혼자 놀러온 여자는 나뿐이고 모두 가족들, 특히 아이들과 함께였다. 남선공원 체육관에는 빙상장이 있다. 여름에 스케이트장은 별세계다. 잠깐 수영장 개장 전에 들러봤더니 냉장고 속에 들어온 듯 시원한 냉기가 맨살에 스친다. 여름방학 특강을 듣는 아이들이 대부분이고 한쪽에서는 쇼트트랙 선수반인 듯 한 학생들이 몸을 잔뜩 굽힌 채 빙상 위를 걷는 연습을 하고 있다. 보기만 해도 허벅지가 단단해지는 느낌이다.

파도풀장에 입장하니 생각보다 아담한 규모다. 파도도 크지 않아 아이들과 놀기 적당하다. 유유자적 물에 몸을 맡기고 시간을 보낸다. 놀아줄 아이도 없고 삐걱거리는 몸뚱이도 중력으로부터 벗어났으니 이게 바로 신선놀음이다. 두 시간을 놀고 수영장을 나왔다. 오늘 몇 번 샤워를 하는지....



체육관을 나와 다시 버스를 탔다. 지도는 은행동 성심당을 찍었지만 꼭 성심당에 갈 생각은 아니었다. 성심당이 있는 은행동 거리가 목적지다.

예전엔 그냥 은행동, 은행동 사거리로 불린 거 같은데 신기한 이름이 붙어있다. 으능정이 거리? 뭔 뜻인가 했더니 거리 중앙에 천년된 은행나무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 은행나무 덕에 이곳이 은행동이 되었나 싶다. 근데 그 은행나무는 어디에? 보이지 않는다. 이름만 남기고 베어진 건가?

내 기억에 은행동은 시내중심부에 옷가게, 신발가게, 식당과 카페들로 이뤄진 그리 크지 않은 거리였다. 서울로 치면 명동 같은 곳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 청년들과 청소년들이 돌아다니며 먹고 노는 곳이지만 이젠 오래된 구시가지의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대전시의 중심부는 서구 쪽 충남대 거리로 넘어 간지 오래다. 대전역 바로 앞인 동구는 내가 어릴 때도 이미 서서히 그 빛이 바래더니 지금도 여전히 그 시절에 머물러있다. 어제 본 소제동만큼은 아니지만 다소 옛 느낌이 살아있는 동네다.

이젠 판암초등학교가 된 판암국민학교를 졸업하고 6학년 4총사는 나와 연민이는 같은 학교로, 두 친구는 다른 학교를 가게 되었다. 6학년을 함께 놀던 친구들은 중학교에 입학하며 조금씩 달라졌다. 나름 공부를 열심히 했던 지연이는 중학교 배치고사에서 1등을 하며 모범생으로 학교 생활을 시작했고 유일하게 같은 아파트단지에 살지 않고 인근 주택에 살았던 다운이는 우리와 먼 학교로 배치되어 소식이 뜸해졌다. 연민이와 나만 등교 길을 함께하면서 작년의 생활과 우정을 붙들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난 새 학교 새 반에 적응하는 동시에  친구를 챙기는 게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특히 연민이는 새로운 학교에 긴장감을 많이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면서도 그녀를 챙겨야 하는게 피곤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스스로도 적응에 고심하는 상황에서 더 힘든 친구를 챙긴다는 건 어쩌면 내 능력 밖의 일이었을지 모른다. 난 그녀에게 도움이 되기보단 그녀의 불안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었다. 다음 학기로 넘어갔다면 좀 더 여유 있게 4총사들과 연락을 나눴을까? 하지만 그럴 틈도 없이 난 여름방학에 서울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전학은 나에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국민학교 때 이미 네다섯 번 전학을 다녔다. 아버지의 직장이 지방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회사 주류에 속하지 못한 것인지 지방 발령이 잦았다. 이제는 서울에 정착한다고 했다. 이번 이사가 우리 가족에게는 마지막일 거였다. 서울은 초등학교 4학년 때 3개월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 때도 아버지의 출장 때문에 잠깐 서울에 머물렀던 것이다. 그 때 느낀 서울 친구들은 흔한 편견처럼 깍쟁이에 똑 뿌러지는 얌채였다. 오래 머무르지 않아 그런 편견을 깰 시간조차 없었기 때문일지 몰라도. 그런데 그런 서울로 다시 가야 하는 것이었다. 이제 대전에서의 인연은 어떻게 될지 몰랐다. 

그렇게 중학교 1학년 2학기에 전학을 했다. 그래도 나와 연민이는 연락을 주고 받았다. 그 때 나눈 수많은 편지는 아직도 오래된 상자 속에 묻혀있다. 그 애도 내가 보낸 편지를 가지고 있을까? 가끔은 편지를 열어볼까?

연민이 덕에 여태껏 대전이 내 마음 한 쪽에 살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친구랑 대학 때까지 연락을 주고 받았으니까. 하지만 우리 사이는 점점 멀어지다가 결국 끊어지고 말았다. 동시에 대전도 나에게는 먼 도시가 되었다. 오랜만에 들른 은행동은 잊고 지낸 친구를 생각나게 해줬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은행동, 지금도 사람이 붐비는 성심당 빵집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까지 이어진 연민이와의 우정을 새삼 기억하게 했다. 궁금하다. 그녀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나와 비슷하겠지? 가족을 꾸렸을 것이다. 또 나와 마찬가지로 일도 하고 있지 않을까? 만난다면... 나이가 들긴 했어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눈에 선한 내 친구의 얼굴. 그녀도 나를 분명 기억할테니까.



구 시가지에는 꼭 지하상가가 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바깥 공기를 차단해줘서 이동을 편리하게 해주는 지하도. 무궁화호 열차처럼 오래된 냄새를 풍기는 곳. 으능정이 거리에서 지하도를 건너면 건물들 사이 협소주택처럼 지은 건물에 국제서림이란 이름의 서점이 귀엽게 자리 잡고 있다. 은행동 거리도 물렸기에, 서울행 무궁화호를 기다리기엔 아직 시간이 너무나도 많이 남았기에, 서점으로 향했다. 

3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분이 서점을 지키고 있었다. 사실 책을 살 생각은 없었지만 막상 눈에 들어오는 책들을 펼쳐보고 있자니 책읽기에 집중이 잘 되는 분위기였다. 스윽 훑어보다 어제 찜질방에서 본 희곡작가의 글이 생각나서 그 작가의 대본을 보고 싶어졌다. 혹시 대본집도 있냐는 질문에 남자분은 2층에 몇 권이 있다고 했다.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했다. 창가에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어 책을 읽기엔 편해 보였다. 하지만 찾던 희곡 대본은 없고 드라마 대본집만 있었다. 그냥 시간이나 보내자 하는 생각에 이런저런 책들을 훑어보는데 얼마 전 아이를 출산한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참 이럴 때 하필.... 그냥 무시하려다가 카톡창을 열었다. 그녀는 독박 육아중인 답답함을 토로하기 위해 카톡창을 연거 같았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딜 상태인 거다. 알지 알지... 그 마음.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니 카톡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예상치 못한 대화의 홍수에 손가락을 바쁘게 날리다 보니 어느덧 다른 손님들 여럿이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책방 의자를 차지하고 카톡에만 열심인 내 모습이 좀 민폐스러운 듯 해 일단 자리를 옮겨야겠다 생각했다. 지하도가 좋겠다. 아까 지나온 지하도 안에는 벤치가 있는 만남의 광장이 있었다. 책방을 나오려다 오래전에 사려다 말았던 책을 봤다. 이미 베스트셀러가 되어 뒤늦게 보기도 민망했지만 한번쯤은 꼭 사서 봐야지 했던 책이다. 아는 작가님이 쓰셨기 때문이다. 책 뒷면을 여니 106쇄 발행본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정말 부럽다. 속이 쓰렸지만 쩨쩨하게 굴지 말자. 그새 바뀐 여직원이 회원가입을 하면 책 값을 10프로 할인해 준단다. 오...10프로면 크다. 정가보다 싸게 산다는 생각에 그새 베스트셀러 작가님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는 쑥 들어갔다. 기분이 좋아졌다.



지하도에서 친구와의 카톡을 정리하고 다시 으느정이 거리에 섰다. 이제 기차 출발시간까지 두 시간여 남아서 저녁을 먹고 슬슬 역으로 향할 계획이다. 


왼쪽부터 은행동 거리(으느정이 거리), 국제서림, 성심당


원래 이번 여행은 좀 더 길게 계획했었다. 갑자기 떠난 여행, 혹은 가출을 이걸로 끝내는 게 맞을까? 고민이 된다. 결국 나는 이정도 일탈밖에 못하는 답답한 인간인가? 너무 자책하지 말자. 작은 일탈을 실행했으니 다음은 좀 더 손쉽게 할 수 있겠지. 

요즘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이 들었다. 2년에 걸친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예상하지 못한 슬럼프에 빠졌다. 2년 동안 헤매기만 하던 글쓰기, 점점 자존감은 낮아져서 아침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몸뚱아리를 일으킬 힘이 없었다. 이 프로젝트만 중단하면 좀 살만할 줄 알았는데.. 어찌어찌 중단하고 나니 또 다른 것을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일에서 벗어나서 하고 싶은 얘기를 자유롭게 써보자 싶었다. 오랜만에 신이 나서 키보드두들기기에 집중하기도 했다. 그런데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제작사에서 연락이 왔고 이제 막 쓰기 시작한 아이템을 얘기하자 관심을 표했으며 같이 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러자 갑자기 겁이 확 났다. 이제는 키보드를 신나게 두드릴 수 없었다. 2년간 꿈속에서도 놔주지 않던 부담감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되살아났다. 이것도 어쩐지 실패 할 것만 같았다. 자꾸 눈물이 났다. 가슴이 꽉 막혔다. 겁쟁이, 패배자... 자꾸 그런 단어들이 맴돌았다.

그래서 한동안 피했다. 드라마, 영화는 보지도 않았고 관계없는 짧은 영상들과 sns 게시물, 단순한 게임 같은 것들로 시간을 때웠다. 사춘기 아들처럼 혼자 방구석에 틀어박혔다. 노트북은 아예 켜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는 남편의 눈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감정이 폭발했다. 난 원래 비염이 좀 심한데 요즘 날이 더워지면서 실내와 실외 온도차로 비염이 더 도졌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재채기와 콧물로 정신이 없었다. 아침부터 고생 고생을 하고 있는데 보다 못한 남편이 짜증스럽게 한마디를 던졌다. 약국에서 약이라도 사먹으라고. 그 한마디에 서러움이 터졌다. 당신 눈에도 내가 한심하구나... 비염 때문에 고생하면서도 버티는 내가 한심해서 한 소리였겠지만 나에게는 나 자신에 대한 한심함으로 받아 들여졌다. 내가 그랬으니까. 나도 내가 한심했으니까. 남편의 말에 내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폭발했다. 화가 났다. 나에게도, 남편에게도. 

그래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더운 날 고생 좀 시키고 싶었다. 정신 좀 차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뭐.... 그런 목적에 비해 이번 여행은 그리 고생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끓는 듯 한 여름 아스팔트 위를 방황하는 것만으로도, 목적지가 없는 여행에서 땀을 줄줄 쏟아내는 것만으로도 평소의 무기력에서 조금은 해방된 듯 했다.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자 나에 대한 애정이 조금은 회복되었다고 할까.



원래는 대전에서 하루를 보내고 경주로 향할 생각이었다. 경주 바닷가 찜질방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시내로 돌아와 관광을 하려고 했다. 시간이 맞으면 경주에 사는 아는 언니도 만나고 싶었다. 대학 휴학시절 미국에 잠깐 갔을 때 만난 언니다. 그녀는 경주 토박이다. 한 10년 만나지 못했지만 일 년에 몇 번은 연락하는 사이니 연락만 하면 반겨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무리하지 말자 싶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떠난 길이 아니다. 나에게 집중하기 위한 길, 무리가 되지 않는 정도에서 마무리 하고 싶었다. 사실은 떠날 때 왜 하필 대전이냐는 물음에 확실하게 답할 수 없었듯 왜 이렇게 마무리하냐는 질문에도 뚜렷한 답은 없다. 그냥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할뿐. 여전히 일탈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냥 그게 나다.



저녁은 시원한 냉짬뽕으로 해결하고 대전역으로 향했다. 아직 1시간 넘게 시간이 있었기에 서점에서 산 소설책을 폈다. 솔직히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예전에도 이 작가님의 책을 본 적이 있어서 비슷한 느낌일거라고 막연히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정말 재미있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참 맛깔나게 썼다 싶게 매끄럽고 유머러스하며 울림이 있었다. 이 작가님, 성공할 만 했구나 싶었다. 덕분에 내 작은 일탈도 이 소설처럼 행복하게 마무리 될것 같은 느낌이다. 가끔 여행길에서 특별한 인연을 만난다. 이번 인연은 이 소설책이 아닐까.

이제 다시 무궁화호 열차 안이다. 어제보다 쿰쿰한 냄새가 더 심해진 열차에 몸을 싣고 이번 여행에서 인연이 되어준 책을 읽으며 그렇게 여행 혹은 가출을 마무리한다. 달라진 건 없지만 다시 한 번 버텨보자고 다짐했으니, 한동안은 머리를 비우고 지낼 수 있겠지. 그렇게 살다보면 용기가 차오르는 날도 있을 거다. 두려워도 한 발짝 내딛여 볼 용기가. 그런 날을 기대하며 ‘가출 혹은 여행기’를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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