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결혼이 불러온 파란에서 이어집니다. 우울증, 자살, 죽음과 관련된 내용이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결혼이 급해진 이모는 선을 봐서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제일교포로 일본에서 가업을 이어받아 2대째 만두집을 경영하는 사업가였다. 그는 한국 여자와의 결혼을 원했고 한국에 살고 있는 친척을 통해 이모와 선을 보게 된 것이었다. 이모가 그 남자를 마음에 들어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결혼이라는 목표에 집중되어있던 이모가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남자 쪽은 조건이 괜찮았던 것 같다. 일본에서 제법 자리를 잡고 사업을 일으킨 집안이라 외조부모님도 마음에 들어 하셨던 것 같다. 남자 쪽도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가정을 이룰 여자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입장에서 이모가 귀했을 것이다. 그에게도 결혼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이모는 엄마의 결혼 한 달 전에 먼저 결혼식을 올렸다. 세 자매 중 가장 먼저였고 선을 본 지 두 달 만이었다. 식을 올리자 이제 일본으로 건너갈 일이 남았다. 그런데 이모는 이민 서류를 준비하면서 큰 혼란을 겪었다. 일본이라는 낯선 땅, 만두가게라는 가업, 서른이 넘은 그녀에게 완전히 새로운 땅에서 모든 것을 다시 익히고 배워야 한다는 현실이 무겁게만 다가왔다. 그녀가 의지하고 살아온 가족과도 기약 없는 이별을 해야 했다. 아직 잘 알지 못하는 남편을 믿고 혈혈단신으로 건너가 평생을 산다는 것, 쉽게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결혼식은 어떻게 부랴부랴 치렀지만 이제 곧 닥쳐올 현실을 생각하니 이모의 마음은 불안감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결혼식을 치렀다는 현실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남편이 될 사람은 패물도 넉넉히 건넸다고 한다. 이미 그것을 모두 받았고 친척, 가족, 친구, 모든 사람에게 공표까지 했으니 결혼을 무르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모는 다시 거친 파도에 휩쓸려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깊이가 달랐다. 그저 며칠 누웠다가 털고 일어나던 무기력을 넘어 ‘모든 것은 되돌릴 수 없게 되었고 결국은 끝’이라는 절망의 깊이였다.
이모는 아무도 모르게 한 모텔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결심을 실행한다. 그것이 이모의 첫 자살 시도였다.
화려한 벽지가 발린 작고 낡은 방. 창이 없어 낮인지 밤인지도 모를 곳에 그녀가 들어선다. 그녀는 긴 여행을 마친 여행객처럼 지친 얼굴로 침대에 쓰러지듯 눕는다. 몸을 잔뜩 웅크려 태아와 같은 자세로 눈을 감는다. 해가 지는지 뜨는 지도 모를 방에서 미동 없이 잠이 든다. 어두운 방이 더욱 어두워졌을 즈음 그녀가 일어난다. 비몽사몽 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킨다. 정신이 깨어나자 불현듯 놀란 표정이 된다. 잊고 있었던 현실이 무겁게 내려앉아 가슴이 답답해진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아둔 가방을 연다. 미리 사두었던 소주 한 병을 꺼낸다. 입에 한 모금을 흘려 넣으며 다시 한 번 생각한다. 그녀는 상상한다. 배에서 내려 낯선 이국 땅을 밟는 자신의 모습을, 낯설고 어색한 남편의 가족을 만나는 모습을, 앞으로 운영해야 할 만두가게를 둘러보는 모습을,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그리고 심장이 조여 오는 것을 느낀다. 다시 소주병을 든다. 이번에는 크게 한 모금을 삼킨다. 갑자기 눈물이 솟는다. 할 수 없다. 나는 해내지 못할 것이다. 절망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울린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두렵다. 두렵다. 두렵다.
그녀는 어두운 방 안에서 시한부를 선고받은 사람처럼 절망했을 것이다. 나는 이모의 깊은 절망과 두려움을 느껴보려 애써본다.
이모가 누군가에게라도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었더라면... 누군가의 힘을 빌려서라도 결혼을 되돌릴 방법을 찾았더라면... 머리속에 자꾸 어쩌면 되돌릴수 있었을 방법들이 떠오른다. 결국 나는 이모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다.
이모는 학창시절 느꼈던 절망감을 주변에 알리지 못했듯 이번에도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지 못했다. 절망에 빠진 그녀의 사고는 죽음만이 유일한 탈출구이자 해결책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 상상하기 힘들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는 게 이토록 힘이 든다. 그 생각의 고리에 말려들면 스스로는 절대 헤어 나올 수 없다.
다행히 이모의 자살시도는 미수로 끝났다. 어두운 표정의 여자가 혼자서 방을 잡는 것을 의심스럽게 생각한 모텔주인 덕이었다. 가족도, 친구도, 남편도 아닌 그 이름 모를 모텔 주인의 도움으로 이모는 이후 30여년의 생을 선물 받았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나는 이모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