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다에서 이어집니다.)
이모는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하지 못했다. 예상한 결말이었기에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한 번씩 우울의 파도가 밀려오면 그녀는 심연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았고 그 시간은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가부장적인 대가족이 대부분 그렇듯, 외갓집 가족 구성원은 고민이 있어도 털어놓는 성격이 아니었다. 기쁘고 자랑스러운 일은 함께 나눌 수 있었지만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고통을 드러낸다는 것은 다른 가족까지 힘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네 할머니, 어머니들은 고민이 있어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다만 머리를 싸매고 방에 들어가 누웠다. 가부장적 가족 분위기에서는 모든 가족 구성원이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했지만 특히 여자들에겐 더욱 자신의 고통을 숨기고 삭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이모 역시 우울하고 힘들어도 그저 자신의 방에서 며칠 누워 지내는 것으로 해결했다. 방문을 열고 나온 이모는 이제 괜찮아졌다는 듯 웃었다. 자기 문제로 가족 누구도 괴롭게 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애를 쓴 것이다. 결국 가족 누구도 이모의 병이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큰 오빠와 남동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면서 자립했다. 하지만 큰 이모는 계속 외할아버지 아래 머물렀다. 직장을 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모는 백화점에서 판매나 영업 등의 여러 일자리를 전전했다. 하지만 모두 짧은 기간 했을 뿐이고, 소속감을 주는 일도 아니었다. 만약 이모가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아니라 평범했다면, 집안 사정에 맞게 인문계가 아닌 상업고등학교를 진학했을 테고 그랬다면 작은 회사에 들어가 경리 일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차라리 고등학교 학력이 없었다면 공장에 취직을 했을 수도 있다.
이모의 삶은 부조리했다. 학창 시절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 시절 그 도시에는 그녀가 정착할 곳이 없었다.
그렇게 변변한 소속도 없이 지내던 이모에게 누군가 간호대학 진학을 권유했다. 대구 동신병원에는 3년제 간호대학이 있는데, 이모가 학창 시절 공부를 잘했었다는 소문을 들은 주변인이 한번 도전해보라고 권한 것이다. 이모는 졸업을 한지 꽤 지난 시점에서 다시 공부를 해서 시험을 쳤다. 필기는 합격했다. 하지만 면접에서 떨어졌다. 종교에 대한 질문 때문이었다. 그곳은 기독교 대학이었는데 이모에게 교회에 다니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이모는 솔직하게 다니지 않는다고 답했고 그 이후 아무런 질문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이해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그런 일도 있었다. 억울해서라도 다시 한번 도전해 볼 만도 했을 텐데, 이모는 다시 도전하지 않았다. 간호사가 된 이모? 어쩐지 상상이 잘 안 간다. 이모도 그렇지 않았을까? 간호사가 된 자신이 스스로도 상상이 가지 않았기에 순순히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이모가 정착한 것은 의외의 직업이었다. 바로 한국 야쿠르트, 우리가 흔히 말하던 야쿠르트 아줌마라는 직업이다. 요즘에는 프레시 매니저라는 세련된 이름으로 부르는 이 직업이 이모가 유일하게 오랫동안 몸담았던 일이다. 동네의 일정한 루트를 다니며, 주문한 야쿠르트를 배달하고 간간히 길에서도 판매하는, 어느 정도 자율성이 보장되면서도 규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른 직업을 가지기에는 가끔 나타나는 우울증상이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야쿠르트 배달일은 혼자 하는 일이기에 약간의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모는 우울증상으로 삼사일 일을 못하게 되면 밀렸던 주문을 한 번에 배달하곤 했다고 한다. 다행히 당시 고객들은 이모의 사정을 봐주었다고 한다.
이모가 20대였던 70년대는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이 독립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여성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아버지, 혹은 남편 아래 종속되어 있었다. 이모 역시 뚜렷한 직업이 없었기에 계속 외할아버지의 그늘 아래 살았다. 하지만 큰 불만은 없었던 것 같다. 어린 여동생들이 아직 학교에 다니며 같이 살았기 때문이다.
이모는 7살, 9살 어린 자매들과 어울려 지내며 자신의 독립 시기를 늦췄다. 엄마의 기억에 이모는 밖에서 신기한 일들을 하며 재미있게 지내는 언니였다. 한 번은 이모가 가정에서 식빵을 만들 수 있는 기계를 파는 장사꾼을 따라다니며 보조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일이 끝나면 시범으로 보여주며 만들었던 식빵을 산더미처럼 싸가지고 돌아왔는데 엄마는 그때 그 식빵이 얼마나 맛있었던지 이모가 그 일은 오래 하길 바랐었다고 한다.
따분한 학교에 매여 있던 엄마와 작은 이모에게 큰 이모는 재미있고 자유롭게 사는 언니였다. 세 자매는 늘 깔깔거리며 웃고 수다를 떨고 같이 놀고 함께 잠을 잤다. 이모는 이 시기에 크게 바라는 것이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동생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어린 시절이 연장된 것처럼 그냥 이대로도 행복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은 머물러있지 않는다. 아무리 붙들고 늘어져도 변화를 막을 수는 없다.
80년대 초, 여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대가 되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때 큰 이모는 이미 서른이 넘었고 당시만 해도 결혼 적령기를 넘긴 때였다.
엄마가 먼저 결혼 소식을 알렸다. 엄마는 울산에 있는 큰 오빠 집에 가기 위해 고속버스를 탔다가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군인아저씨를 만났다. 군인아저씨, 즉 나의 아버지는 엄마에게 홍콩영화 속 여배우를 닮았다는 흔한 수작으로 접근했고 그렇게 만나 1년여의 연애 끝에 결혼을 결심했다. 뱃속에 이미 내가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결혼이었다. 결혼식 준비는 착착 이뤄졌다. 게다가 둘째 이모도 결혼을 서둘렀다. 둘째 이모는 고등학교 때부터 만나던 남자친구가 있었고 양가도 알고 지내던 사이라 언제 결혼날짜를 잡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엄마의 결혼발표로 그녀 역시 결혼을 서두르게 된 것이었다. 갑자기 여동생 둘이 떠난다고 생각하자 큰 이모는 마음이 급해졌다. 이렇게 갑자기 여동생들이 집을 떠날 줄은, 집에 부모님과 자신만 남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상황이 변하면서 마음이 다급해진 이모는 일생일대의 무리수를 두게 되었다.
<이모를 만나다> 3화에서 이모의 성장 배경과 학창 시절을 최대한 자세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고자 했다.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글을 공개하고 고민이 많아졌다. 이모에 대한 기록을 내 멋대로 남기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모를 만나다>를 시작한 것은 철저히 나를 위해서다. 나에게 남아있는 그녀의 유산을 파헤치고 기록해서 그녀를 명확하게 정의하고 싶었다. 그리고 글을 통해 이모를 되살려낼 수 있다면, 비로소 나도 그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오히려 걱정이 커졌다. ‘내가 이모를 얼마나 안다고 그녀의 삶을 해석하고 정의하지? 나한테 그럴 권리가 있나?’라는 질문부터, 결국 나의 부족한 글 때문에 이모가 혼란스럽고 왜곡된 이미지로 남겨질 것이라는 걱정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렇게 글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 끝에, 다시 컴퓨터를 켰다. 결국 나의 엉성한 단어와 문장들은 그녀의 삶을 완벽하게 되살리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지극히 단편적인 모습을 기록하는데 그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글을 쓰기 위해 그녀의 삶을 자세히 보려는 노력과 과정 그 자체에 가치가 있다고 믿고 싶다. 그녀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길어 올리는 과정에서, 몰랐던 혹은 잊고 있었던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길 두 손 모아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