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는 1949년에 태어났다. 그 해는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백범김구 암살사건이 있었던,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전 해다. 이모는 베이비붐 이전 세대이지만 일제강점기를 겪지 않았고 한국전쟁 역시 어렸을 때라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베이비붐 세대와 의식을 공유한다. 전쟁에 대한 의식적인 기억은 없지만 무의식 영역에서는 무언가 새겨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기술하고 보니 이모가 정말 오래전,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났다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이모가 살아 계시다면 올해 75세이다. 나의 큰고모와 같고 시어머니보다는 3살이 많은 나이다. 즉 큰 이모, 큰고모, 시어머니는 같은 세대다. 하지만 살아온 삶의 결은 각각 다르다. 나의 시어머니는 전라도 농촌 출신으로 결혼과 동시에 서울로 건너와 가정주부가 되었고 6년 전 시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혼인관계에 계셨다. 큰 이모와 동갑인 큰 고모도 충청도 농촌 출신으로 결혼하여 대전이라는 도시로 올라왔지만 결혼생활은 일찍 끝났고 혼자 가게를 운영하며 외동딸을 키우셨다. 시어머니와 큰고모는 두 분 다 학교를 오래 다니지 못했다.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정도의 학력, 그 시대 농촌에서 나고 자란 여성들은 학업에서 소외된 경우가 많았다. 큰 이모도 경상도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서는 대구로 올라와 도시에서 자랐다. 도시에서 자란 덕분에 큰 이모는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두 번의 결혼과 파혼을 겪었지만 결혼생활은 통틀어 3년여에 불과해 거의 독신으로 지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세 여인은 삶은 출발부터 지내온 환경과 고비가 각각 달랐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난 이는 큰 이모다.
다시 이모의 어린 시절로 돌아와 본다. 그녀의 어린 시절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외갓집에 대한 설명을 빼놓기가 어렵다. 외갓집은 전형적인 가부장제 대가족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다섯 형제자매까지 무려 아홉 명의 식구가 함께 사는 대가족. 이모는 그중 둘째로 태어났다.
외갓집은 경상도 합천에 있었다. 어느 정도 학식이 있었던 집안이었는지 이모의 아버지, 즉 나의 외할아버지는 그 시대로선 드물게 중학교까지 다니셨다. 외할아버지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갈 계획도 있었으나 부모님이 병에 걸리는 바람에 포기했고, 한국전쟁을 겪은 후에는 도시로 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하셨다. 젊은 나이였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자식들을 부모님에게 맡기고 대구로 올라와 장사를 시작하셨다. 좌판에서 팥죽을 팔았는데 동네 건달들한테 치여 장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고민 끝에 시계수리 기술을 배웠다. 좌판에서 시계를 팔고 고쳐주는 일을 해보니 어떤 계산이 나왔는지, 시골의 재산을 전부 처분해서 대구 시내에 시계방을 열었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 시골에 있던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나와 대구에 정착한 것이다.
시계가 귀한 시절이라 안정적인 벌이가 가능했다. 그래서 아들 딸 가리지 않고 학교에 보낼 생각도 하신 것 같다. 외할아버지 당신이 배운 편에 속하셨기에 자식들도 교육은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다.
이모는 초등학교를 다녔던 시절에는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어느 날 선생님께 ‘좀 더 노력하면 공부를 잘할 학생’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때 그 선생님의 말이 이모가 공부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이모는 학업에 매진했고 선생님의 예언대로 성적을 잘 받았다. 그때는 중학교도 시험을 보고 들어가던 시대였는데 이모는 그 도시에서 가장 좋은 중학교에 진학했고 늘 전교 1등을 했다고 한다. 이후 아홉 살이 어린 엄마가 이모가 졸업했던 학교에 입학하자 학교 선생님들이 엄마를 두고 동생은 얼마나 공부를 잘하나 궁금해했다는 것을 보아 이모가 학교에서 꽤 유명한 학생이었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모는 공부에 열심을 넘어 집착했던 것 같다. 누가 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자신은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니 잘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성적도 좋았지만 고등학교 진학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모는 위로 3살 많은 오빠, 아래로 2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었다. 이모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을 때 큰외삼촌 역시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었고 작은 외삼촌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으니 이모의 진학은 아들들에게 밀려 후 순위가 되었다. 어른들은 그녀에게 중학교까지만 졸업하라고 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외할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고등학교를 보내지도 않을 거면서 왜 이모가 공부에 그토록 집중하도록 둔 것일까? 왜 좋은 중학교에 갔다며 자랑스럽게 온 마을에 떡을 돌린 것일까?
결과적으로는 집안의 만류에도 이모는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모의 사정을 안타깝게 여긴 학교 선생님들이 주선해 장학생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모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선생님들의 기대에 부흥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을 것이다. 장학생인데 공부를 소홀한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폭탄은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중학교 진학에서 겪었듯 학업은 연장되었을 뿐 언젠가는 끝나는 것이었다. 그건 이모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는 이모가 새벽같이 일어나 공부에 열중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당시 엄마는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 나이였는데, 새벽에 눈을 뜨면 늘 이모가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집중했던지 등교 시간도 잊고 뒤늦게 허겁지겁 학교로 달려가곤 했다. 급하게 뛰어가다 넘어져 무릎이 깨지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이모는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공부만 하느라 첫째 딸이었음에도 집안일에는 손 하나 대지 않았다. 어린 두 동생들이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할 때도 큰딸인 이모는 제외였다. 공부를 잘한다고 아무것도 시키지 않은 것이다.
그런 이모가 달라진 것은 고등학교 3학년 2학기였다. 이모는 그때부터 한 번씩 무기력한 상태로 며칠을 방에서 누워만 지냈다고 한다. 책도 공부도 모두 놓아버리고, 밥도 먹지 않고 씻지도 않은 채 온종일 잠을 잤다. 아마도 그때부터 이모에게 우울증이 찾아온 것 같다. 이해가 가는 일이다. 이모가 지금까지 해왔고, 유일하게 잘하는 것은 공부였다. 하지만 이것을 할 수 있는 기한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모에겐 미뤄놨던 고민,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무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숙제가 바로 눈앞에 닥쳐오고 있었다. 이모의 공부에 대한 고지식함은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이 아닌 삶에 대한 상상을 하지 못하게 만든 것 같다.
이모가 공부에 매달린 시간들은 반대로 많은 것을 잃은 시간이었다. 십 대 청소년 시기에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이성에 대한 감정, 생활에 대한 감각, 미래에 대한 고민, 사회에 대한 관심, 관계 맺기 등등. 많은 것을 겪고 느꼈어야 하는 시간들이 모두 공부로 수렴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모 삶의 전부였던 공부는 이제 끝나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모는 자신의 전성기가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고 허무하게 사라진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다. 이모에게 공부를 강요한 사람도 없었고 혼자 알아서 잘하기에 그저 칭찬하고 응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모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미래에 대한 고민이었다. 미래가 없는 공부에 매달리는 것은 사실 이모에게 무의미했다.
어쩌면 모두 곧 다가올 현실을 외면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모는 공부를 하고 있는 지금이 계속 영원하길, 가족들은 그저 저렇게 좋아하는 공부를 하며 이모가 변함없이 행복하길 바란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모의 삶은 조금씩 병들어가고 있었다. 현실을 마주하지 않은 대가는 아주 냉정하게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