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이 May 02. 2021

4월을 보내며

기억의 촛불 하나

산다는 건, 나이를 먹는다는 건 상처와 치유의 흔적을 새기는 일이다. 삶의 고비에서 겪는 고통과 시련의 상처에 깊이 패이고, 기쁨과 깨달음의 치유로 옅어지길 반복하며 생의 고유한 무늬를 그려나간다. 고목이 옹이를 새기고 나이테를 그리듯이.

     

4월은 탄생의 축포와 함께 시작되었다. 봄은 어김없이 우리 곁에 다시 찾아와 꽃을 피우고 새싹을 틔웠다. 짧은 생의 한때, 돌이킬 수 없는 이 순간이 더없이 아름답고 신비로워서 봄 마중에 흠뻑 취하다가 어느새 맞은 4월의 마지막 날. 계절은 때를 맞춰 왔다가 홀연히 떠나가건만, 나의 4월은 그 끝을 붙잡고 놓지 못한다.

문득 선혈이 툭 떨어진다. 세월의 더께 속에서도 지혈되지 않은 채 웅크리고 있던 아픔이 꽃처럼 빨갛게 봉오리를 터뜨린다.     


햇살 아래 싱그러운 봄꽃이 아름답다 못해 끝내 아픈 것은, 지난날 피지도 못하고 짓밟혀버린 우리 아이들의 미소가 거기에서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이제 고요와 평화의 품에 안겼다. 해마다 이맘때면, 꽃송이를 살랑이고 새싹을 어루만지는 바람으로 찾아와, 남겨진 우리의 슬픔을 달래주는 듯하다. 삶이 꺾이던 순간의 두려움과 고통은 이제 오롯이 살아남은 이의 몫이 되었다.     


자연의 무심함은 생의 순리를 이토록 아름답게 지휘하는데, 무정한 인간 세상은 잔인하게 굴러간다. 아픔은 또 다른 아픔에 덮이고, 부조리는 또 다른 부조리에 묻힌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벌건 상처를 그대로 밟으며 굴러간다. 연달아 밀려드는 격랑 속 소용돌이에 진실은 실종되고 삶은 난파선처럼 표류한다.

     


폭력의 크기는 인간 욕망에 비례하는 것일까.

세상은 눈부신 변모를 거듭했다. 우리 삶은 자동화와 가상현실이라는 낯선 섬에 닿았다. 이로써 전통적 삶의 방식은 새로운 가치 질서로 대체되고 있다. 어지럽혀진 자연 생태계는 멀리에서부터 경고음을 울린 지 오래다. 환경오염과 이상기후, 생태계의 멸종 등으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위협적인 메시지를 전해온다. 그 메아리가 귓전에 닿을 무렵, 급기야 코로나가 우리를 강타했다. 우리 삶은 절체절명의 살얼음판 위, 운명의 기로에 놓였다. 이를 틈 탄 욕망은 또 다른 힘의 불균형을 낳고, 약체의 낙오된 삶은 더욱더 피폐해졌다.

 아름다운 이 계절에, 인도에서는 코로나 아비규환으로 사람이 동물처럼 죽어가고, 빈민국 아이들의 굶주림은 더욱 극심해졌다고 한다. 미얀마의 독재 권력은 횡포를 더하며 오늘도 무고한 생명들을 희생양 삼고 있다. 우리 가까이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폭력으로 힘없는 생명이 꺾이고 짓밟히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폭력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다음 표적은 또 누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욕망의 저울질과 눈앞의 이익에 수수방관하는 사이, 우리 눈과 귀는 멀고 삶은 벼랑 끝으로 치닫는다.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어느새 기성세대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나.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밀고 밀리는 데 일조한 장본인임을 부인할 수 없다.

      


4월의 마지막 날 봄비가 촉촉이 내렸다. 나무는 상처가 깊을수록 더 짙은 향기를, 더 멀리까지 피워낸다고 한다. 깊게 팬 옹이의 쩍쩍 갈라진 상처를 비에 적시며, 향기로운 숲 내음으로 존재의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봄 꽃송이처럼 태어난 삶은 흐르는 세월 따라 나무를 닮아간다. 희로애락의 흔적들은 서로 다른 모양으로 각자의 삶에 옹이를 새긴다. 50여 년의 시간 동안 내 삶에 패인 옹이들은 어떤 무늬를 그리고 있을까?

그것은 탐욕에 물든 자기애의 흉물이 아니어야 한다.  향기를 내뿜는 나무숲처럼, 나의 고통이 타인의 고통에 닿아 서로를 어루만져 주면 좋겠다. 타인의 숨겨진 눈물과 고통을 볼 수 있는 맑은 눈과 귀를 지니길 바란다. 내 삶을 위한 선택이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지 않기를.  

    

지나간 역사가 말해주듯이 묻혀버린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제 모습을 드러낸다. 부조리 속에 가라앉은 세월호의 진실도 언젠가는  모습으로  떠오를 것이다.


4월을 보내기 전에 기억의 촛불 한 송이를 마음속에 지핀다. 흔들리는 불씨를 지키려는 파수꾼의 마음이 되어. 촛불 하나하나가 모여 진실의 잠든 부력에 거대한 힘을 일으키면,  묻혔던 진실은 곧 수면을 향해 떠오를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그런 길로 가면 좋겠다. 나보다 연약한 생명을 지키려는 파수꾼의 욕망.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살랑이는 꽃송이를 보며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 옛날 더벅머리 우리 선생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