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전 내가 다니던 여고는 시내 대로변에 있었다. 볼품없는 빨간 벽돌 건물에 직사각형의 희뿌연 운동장이 지금 떠오르는 학교 풍경의 전부이다. 회색빛 기억 속에서도 교정 모퉁이를 지키던 오래된 나무를 떠올릴 때면, 마음 한구석이 아련한 수채화 빛으로 물들여진다. 그 넉넉한 품 아래 벤치에서 울고 웃던 우리의 속삭임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그 사이 세상은 눈부신 변화를 맞았지만, 학교 풍경만큼은 다른 듯 닮았다. 여전히 교복을 입은 학생이 있고 선생님이 있다. 교사는 아이들을 규율과 질서 속에 가두고, 아이들은 끊임없이 울타리를 넘나 든다. 교사는 권위적이고, 아이들은 그에 순응한다. 물론 그 정도나 빛깔은 확 달라졌다. 예전에는‘체벌’을 문제 삼지 않았다. 선생님 꾸중에 손바닥 매를 맞고 훌쩍거리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만큼 '학생 인권'은 주목받지 못했다. 당시 선생님 모습이란, 근엄한 표정에 묵직한 걸음으로 복도를 걸으며, 뒷짐 진 손에는 지도용 회초리가 들려 있었다.
물론 늘 그렇지는 않았다. 어려운 시절이었던 만큼 선생님의 제자 사랑은 훨씬 순수하고 따뜻했다. 지금과 달리 사제 간의 신뢰와 연대가 끈끈했던 그 시절에 짙은 향수를 느낀다. 당시 선생님 중에는 아직도 내게 특별한 기억으로 또렷이 남아있는 한 분이 있다.
학기 초 어느 날 아이들이 쑥덕거렸다. 좀 괴상한(?)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부임해 왔다고 했다. 과연 그래 보였다. 외모부터 보통의 선생님들과는 사뭇 달랐다. 당시 교사 외모의 전형인 반듯한 양복 차림에 매끈한 헤어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휘청하게 마르고 큰 키의 젊은 남자였다. 드문드문 이빨 빠진 바가지를 엎어놓은 듯 맹한 머리 모양에, 입은 늘 헤벌쭉 웃고 있었다. 낡은 옷매무새에 무릎 나온 바지 차림에서는 동네 개구쟁이 아이들이 연상되었다.
선생님으로서 권위적이기는커녕, 속없이 착하기만 한 동네 오빠 같은 인상이었다. 소심하기 짝이 없던 나조차도, 옆을 지나칠 때면 툭 치며 장난치고픈 충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큼은 마냥 순하면서도 초롱초롱 빛났다. 우리를 향한 호기심과 열정이 느껴졌다.
미술 담당이던 선생님의 수업도 예사롭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분이 가르치는 반에 있어 본 적은 없었다. 친구를 통해 그의 특별한 수업 얘기를 전해 들으며 궁금하고 부러울 뿐이었다.
하루는 우리 선생님에게 사정이 생겼는지 갑자기 그분이 대신 교실에 들어오셨다. 그때 딱 한 번 들었던 그의 수업을 회상해 보면,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선보였던 책상 위 퍼포먼스가 생각난다. 선생님은 대충 때우면 그만일 일회성의 보결 수업에서조차 정성을 다해 엉뚱한 퍼포먼스를 펼쳤다.(대걸레가 등장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틀에 박힌 수업방식에 길들여 있던 우리에게 자유로운 예술 세계를 보여주려 애쓰던 선생님의 시도는 낯설고 생경했다.
당시 학교는 지금보다 훨씬 대규모였다. 교실에는 두 세배쯤 더 많은 애들로 북적였다. 그중에는 권위와 질서에 대항하고 엇나가는 애들이 있었다. 금지된 애교 머리와 또르르 끝을 말아 내린 양말 패션을 사수하던 그녀들. 소위 ‘노는 아이들’로 통하는 부류이다. 반에서는 물 위의 기름처럼 따로 놀고, 거슬리는 존재였다. 교사들의 시선은 그들을 향할 때면 늘 날을 세웠다.
미술 선생님은 달랐다. 학교에서 목격되는 그는 늘 ‘노는 애들’과 함께였다. 그들을 바라보는 선생님 눈빛에는 정성과 따스함이 담겼다. 심드렁하고 거칠던 애들 역시 선생님 앞에서는 진지해지고, 눈이 반짝였다. 수학여행 때였다. 평소처럼 그 애들은 일행에 합류하지 않은 채, 주변을 배회했다. 선생님은 그들 곁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평범한 우리가 알 수 없는 뭔가 열띠고 풍성한 대화가 오가는 듯했다. 노는 아이로 치부되던 그들이 그때만큼은 특별히 귀한 존재처럼 보였다. 그들을 대하는 선생님의 태도가 그랬다. 그에게 그들은 단지 ‘엇나가는 존재’가 아니라, ‘관심과 사랑을 더 필요로 하는 존재’였다.
형편이 어려운 친구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말하며, 현실에 얽매이지 않도록 했다. 꿈을 격려하고, 뒤에서 모르게 도우셨다. 그가 담임이던 반 학생 중에는 내 단짝 친구가 있었다. 재기 발랄한 미모의 그녀는 당시 형편이 꽤 좋지 않았다. 어느 날 친구는 잔뜩 상기되어 나를 찾아왔다. 담임과 면담에서 오랜 시간 나눴던 즐거운 대화를 배가 아프도록 으스대며 자랑했다. 게다가 장학금도 받게 되었다고 했다.
며칠 전 친구에게서 뜻밖의 메시지를 받았다. 바로 그 미술 선생님의 근황이었다. 영상에는 60대 후반 백발의 청년이 나타났다. 우리나라 중견 화백으로 제주도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강요배 선생님이다. 화가로서 삶의 여정을 담은 에세이집 출간을 기념하는 인터뷰 영상이었다. 마냥 부드럽고 상냥하던 청년은 이제 강단과 기백이 더해졌다. 맑고 순하던 눈빛은 여전히 강렬하게 빛을 발했다. “깊어진 예술의 맛은 단박에 ‘좋다’는 걸 알 수 있다. 삶도 마찬가지”라고 힘주어 말씀하신다. 멋지게 나이 드신 모습에 옛 추억이 덧대어지며, 예술과 함께 깊어진 그분의 삶이 느껴진다.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이면서 일을 할 때, 타성에 젖어들 때가 종종 있다. 평소 나는 감정의 기복이 별로 없다 믿었는데 얼마 전 잔뜩 화가 난 적이 있었다. 아이들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감히 어른에게’라는 권위로, ‘거짓말’이라는 단편적 사실에 흥분했다. 아이의 속사정은 고려하지도 않고 덜컥 벌칙부터 가했다. 그 경솔함에 오래도록 자책하는 중이다. 어느새 아이의 눈높이를 벗어나 어른이라는 권위의 틀로 아이를 가두려 했다. 직선의 규율은 때때로 누군가에게는 턱 밑에 드리워진 가시 울타리가 된다.
그 옛날 더벅머리 화가 선생님의 우리를 향한 그림은 깊고 아름다웠다. 직선의 기준선을 지우고, 우리 하나하나를 담는 둥근 그림을 그렸다. 울타리를 낮추고 넓혀 주셨다.
삶은 예술이라 하지 않던가. 살아있는 우리는 모두 예술가이다. 노 화백이 말하는 ‘깊은 맛 나는 예술, 삶’은 어떤 것일까? 선생님을 둘러싼 아름다운 추억은 멀리서 내게 속삭인다. 권위를 지우라고. 아이의 마음을 그려 넣으라고.
현관 밖에 책이 도착했다. 그의 '깊은 맛' 나는 글과 그림을 마주할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