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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호 Sep 10. 2023

크로스핏을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5

애증의 동작(1) 2단 뛰기(Double Under)

크로스피터라면 누구나 어려워하는 동작들이 있다. 역도 동작들은 말할 것도 없이 고난도이고 누구는 체조 동작이 힘들고 어떤 이는 지구력을 요하는 동작들을 어려워한다. 그중엔 버피(Burpee)나 풀업(Pull up), 피스톨(Pistol)처럼 보기엔 쉬워 보여도 막상 하려면 숨이 차거나 스킬이 미숙해서 어려운 것들이 있다. 나에겐 줄넘기가 그렇다. 크로스핏을 처음 시작하고 3년이 훌쩍 지난 지금 까지도 더블언더(Double Under, 2단 뛰기)가 와드에 나오는 날에는 다소 착잡한 마음으로 사물함에 있는 줄넘기를 꺼낸다.


더블 언더를 수행하는 선수 (크로스핏 공식 홈페이지)


처음 박스를 등록했을 때 줄넘기가 와드에 나온다고 하니 내심 반갑기도 했다.(다른 동작들에 비해 만만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줄넘기를 해본 적이 언제인가를 떠올리기도 어려울 만큼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체육시간에 친구들과 2단 뛰기를 연습했던 기억 정도가 마지막이고 성인이 된 이후부터는 줄넘기를 해본 적도, 하는 사람을 본 적도 가물가물했다. 그런데 적어도 크로스핏에서는 줄넘기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니 이 동작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매번 이 힘든 만남을 계속해야 한다.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체력적으로 힘든 것은 물론이고 세차게 돌리는 줄이 걸리면서 팔이나 등을 때리기 때문에 몸 여기저기 줄에 맞은 흔적이 남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힘들다. 물론 잘하는 사람은 와드 중 더블언더를 통해 페이스를 조절하거나 쉬어가는 동작쯤으로 여길 수도 있다. 가끔가다 이제 막 크로스핏을 시작하는 분들 중에 더블언더를 꽤 손쉽게 잘하는 경우도 있다. 점프도 가볍고 돌리는 손도 무척 부드럽게 휙휙 돌아간다. 그런 분들 옆에서 와드를 하는 경우에는 '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더블언더를 잘했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나 자신을 달래는 편이다. (그런 날에는 평소보다 자주 줄에 걸리곤 한다. 왠지 모르게 더 억울하다.)    


이 동작은 매우 간단해서 굳이 말로 설명하는 것이 비생산적이라고 느껴진다. 설명할 시간에 동작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그럼에도 굳이 텍스트로 설명을 해야 한다면 다음과 같다. 제자리에서 두발을 모아 점프를 하고 줄을 두 번 돌린다. 이것을 반복하는 것이 우리가 요구받는 행위의 전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것이 전부다. 마치 업무로 치자면 '회의자료 2부 출력해서 갖다 놔줘' 정도랄까. 다만 제한 시간 내에 주어진 개수를 과거의 나보다(시합이라면 경쟁 상대보다) 빠르게 하거나 많이 해야 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걸로 설명은 충분하다. 이제 양손에 줄을 가볍게 쥐고 올곧이 서서 정면을 바라본다. 오늘은 왠지 모르게 한 번도 걸리지 않고 와드를 마칠 수 있을 것 같은 이유 없는 자신감이 불쑥 찾아와 인사를 한다. 반갑긴 하지만 와드 시작을 알리는 타이머가 돌아가면 방금 전의 생각과 감정은 곧바로 사라진다. 오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 없이 증발한다고 말하는 쪽이 더 정확하다. 오직 지금 돌리는 줄과 내 다리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내 몇 번의 줄 돌리기가 지속되다가 발끝에 걸려 멈추게 되거나 심장과 폐가 도저히 더 이상은 뛸 수 없다며 휴식을 요구할 때가 온다. '아 오늘도 한 번에 끝내지 못했네'라는 생각이 스쳐가고 타이머를 확인한 후 숨을 고르고 다시 줄을 돌린다. '왜 벌써 숨이 찰까, 어제 술을 마셔서 그런가, 나는 언제쯤 더블언더를 쉽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들도 몇 차례 스쳐 지나가고 나면 어느새 다른 동작을 할 때가 온다. 가지런히 줄을 내려놓고 어떤 날은 바이크를 타고, 또 어떤 날은 케틀벨을 든다. 숨은 갈수록 차고 쓸데없는 생각은 갈수록 줄어든다. 코치님이 틀어주는 음악은 들리지 않고 옆사람이 무슨 동작을 하는지도 보이지 않는다(볼 체력도 남아 있지 않다). 이 공간에 오직 나만 존재하고 있는 느낌과 고통스럽지만 무엇인가 완주해 나간다는 기분이 들숨과 날숨 사이에 남는다. 타이머가 끝을 향해 뚜벅뚜벅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속도로 자신의 일을 다해가는 것을 지켜보며 나도 마지막 라운드에 다다른다. 50번의 점프만 남겨놓은 채 무겁지만 가벼운 마음을 이끈 채 다시 줄을 돌린다. 계획과는 다르게 스무 번째에서 팔과 다리를 멈추고 남은 개수에는 전력을 다하겠다고 나 자신을 속이거나 다독인다. 마지막 열개는 매번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 익숙해지지 않는 저릿함 같은 것이 폐를 찌르고 들어온다. 와드가 끝나면 누워서 천장을 보는 것만을 허락받은 사람처럼 그것을 충실히 이행한다.


2023년 Crossfit Games에서 2단 뛰기 도중 X자로 넘어야 하는 동작이 나왔다. (크로스핏 공식 홈페이지)


장비를 정리하고 사물함에 가지런히 줄을 넣어두며 생각한다.

다음 와드 때는 안 걸리고 넘을 수 있을 거야. 매일 연습할 거거든. 매일 10분씩 연습할 거야.

그리곤 같은 수업을 들은 사람들과 수고했다며 인사를 나눈다. 간단히 와드에 대한 후기를 주고받고 오늘은 정말이지 힘들었다며 다 같이 고개를 젓는다. (이 일련의 과정은 일종의 루틴과 같다. 어떤 날은 서로 마주 보고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저어도 뜻이 통하는 날도 있다.)   

일주일 뒤 사물함에 있던 줄을 꺼내 머쓱하게 인사를 건네며 또 한 번의 후회와 다짐을 계획하지 않기를 바라며 탈의실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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