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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호 Dec 01. 2020

책『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영화 <결혼 이야기>

왜 우리는 사랑을 찾는가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는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들과 나누는 안부인사 중에 서두에 언급되는 편이다. 대답은 결국 "예, 아니오." 둘 중 하나지만 우리는 그 대답 뒤에 숨어있는 수많은 이야기를 기대한다. 기대하는 이야기가 자극적일수록 대게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하지만 막상 그 안부라는 것에 특별함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이 평범하고 들어 봄 직한 패턴의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섣부른 예단이라면 미리 사과드립니다)  


뻔한 줄 알면서도 우리는 늘 타인의 사랑 이야기에 갈증을 느낀다. 나는 더 이상 사랑을 하지 않겠다는 사람은 수없이 봤어도 사랑 이야기가 질려서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혹시 있다면 내 이야기까지만 들어보시는 게 어떠실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영국판 표지

알랭 드 보통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독자들로부터 관심받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비상한 관찰력과 창의적인 비유가 뒷받침된 표현력이다. 과잉친절에 가까운 극 중 인물에 대한 심리 분석과 상황 해설은 때로는 책을 읽는데 불편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느새 적응한 독자는 그의 집요한 설명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여 재정의하거나 현재 자신의 모습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볼 기회를 얻는다. 왜 나는 이 책을 일찍 읽지 않았는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책은 형광펜과 포스트잇으로 덮여있다. 그의 저서는 여러 책이 있지만, 매번 같은 듯 다르게 펴내는 인간 심리와 감정에 관한 사색은 참 마음에 든다. 저자는 자신의 호흡에 맞추어 독자를 감상에 젖게 했다가도 어느새 건저 내어 따가운 뙤약볕에 세우기도 한다. 


아래 세 구절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집어 들 때마다 나의 시간을 꽤 오래 앗아간다. 

다른 사람들과 누리는 행복은 두 가지 종류의 과잉에 의해 제안이 되는 것 같다. 
하나는 질식이고 또 하나는 외로움이다.
상대방에게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는 것은 예의에 속한다. 개인적인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어떤 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 속성이나 특질을 넘어선 존재론적 지위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다.
클로이의 기억이 중화되면서 역사의 일부가 되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런 망각에는 죄책감이 뒤따랐다. 이제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녀의 부재가 아니라, 내가 그녀의 부재에 무관심해진다는 것이었다. 망각은 내가 한때 그렇게 귀중하게 여겼던 것의 죽음, 상실, 그것에 대한 배신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영화 <결혼 이야기>는 찰리(아담 드라이버)와 니콜(스칼렛 요한슨)의 결혼생활 막바지를 그린 영화다. 노아 바움백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한 영화는 적절한 연극적 요소와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가 어우러져 있다. 두 주인공은 변호사를 통해 결혼생활을 마무리하는데 그 과정이 녹록지 않다. 찰리는 뉴욕과 LA를 오가며 극단을 지휘하고, 양육권을 가져오기 위해 자신이 좋은 아빠임을 어설프게나마 흉내 낸다. 니콜 역시 자신이 희생한 삶의 영역을 되찾기 위해 최선을 다해 결혼 생활을 마무리한다. 극 중에서 이혼으로 가는 여정이 슬픈 이유는 양측 어느 쪽도 법정을 떠나 승리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고, 그 과정이 너무나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결혼 이야기> 포스터

둘의 삶은 특별하지 않지만 관객은 니콜이 쓴 메모를 읽는 찰리의 마지막 모습에 눈물을 흘린다. 화자의 아픔이 나의 삶에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상처 받고 뒤돌아 눈물 흘려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관객은 찰리와 니콜을 번갈아가며 위로하기도 하고, 어느 한쪽을 매몰차게 비난하기도 한다. 마음속으로 맘껏 욕하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끝나버린 영화가 서운해질 무렵 우리는 시큰해진 코와 눈을 훔치며 필름을 흡수한다. 


뻔한 사랑이야기가 질리고, 반복되는 실수와 오해들로 점철된 냉혹한 현실에 넌더리가 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설 것이다.

또 다른 질식과 외로움이 있겠지만 우리는 낭만적 실증주의와 금욕주의를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갈증은 멈출 수 없다.

   


작가의 이전글 『잔혹함에 대하여』를 읽고, <엘르>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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