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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Feb 26. 2020

엄마 씩씩하지마

엄마의 주문

"벚꽃이 참 흐드러지게 펴있었지. 엄마가 니 고등학교에 올라갈 때 말이야. 엄마 참 씩씩하게 언덕 잘 올라갔는데."


엄마 혼자 외벌이로 한 달에 90만 원을 손에 쥐었던 날들이 있었다. 당장 튀어나가 돈을 벌어와도 모자랐지만 19살 나는 어중간하게 공부에 욕심이 있다는 핑계로 학교를 벗어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엄마는 강단 있게 '집이 어려우니 도와달라' 말하지 않았고 딸이 공부를 한다는데... 말없이 청소 하나를 더 뛰고 말았다. 19살 봄, 내릴 줄 모르는 학교 등록금에 석식 급식비, 책 값. 90만 원으로 도저히 해결이 안 되었던 엄마는 토요일 오후 학교를 찾아갔다. 엄마는 평생 넘지 않았던 딸의 학교 교문을 처음으로 넘었다. 서류상 이혼이 되지 않았던 탓에 한 부모 가정이지만 혜택을 아무것도 받지 못했던 우리 집 사정을 말하며 학교에서 지원이 가능하냐 물으러 가는 길이었다. 그때 핀 벚꽃이 참 아름다웠노라고, 엄마는 벚꽃비가 내리는 언덕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복잡한 집 얘기를 밖에서 꺼내는 걸 싫어하던 엄마였다. "다른 사람들이 엄마 보면 이렇게 돈 한 푼 없는 걸 모르겠재?" 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정갈하고 빳빳하게 다림질된 옷을 입고 출근하던 엄마였다. "하지만 살려면 어쩔 수 없잖아 학교 가서 사정 얘기하는 것도 이젠 부끄럽지도 않더라" 쿨하게 돌아선 엄마 뒷모습에서 미처 털어내지 못한 벚꽃 잎 하나가 보이는 듯했다. 부끄러움이 많은 엄마가 벚꽃이 핀 언덕을 넘을 동안 무수히 되뇌었을 이야기. 몇 번을 머릿속에서 헤매었을 정돈되지 못한 말들. 벚꽃비를 맞으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혜숙이 아닌 엄마가 된다는 건 이렇게 고비 고비 엄마를 어딘가로 등 떠미는 것만 같았다.


"엄마 씩씩하지?"


엄마가 다녀온 덕에 담임 선생님은 나를 지원대상자로 포함시켜줬고 등록금 일부를 면제받을  있었다. 엄마 덕분에. 엄마의 씩씩함 덕분에.  무렵부터일까,


엄마의 '씩씩함' 싫었다.


자랑스러워야 하는데, 대단해 보여야 하는데. 엄마의 씩씩함이 나에겐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고되 보였다. 쑥스러움이 많아 다른 사람 앞에서 말도 잘 못하던 엄마였는데 엄마의 용기 있는 도전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이럴 때 내가 도움 줄 수 있는 건 미친 듯이 공부를 해서 성공 드라마를 만드는 거였지만 아쉽게도 멋진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었다. 계속 지난한 현실에 기웃거려야만 했던 나는 딱히 성적을 크게 올리지도, 멋지게 꿈을 이루는 성공스토리도 찍지 못했다.


 , 엄마의 씩씩한 고백이 이상하게 싫었던 나는 퉁명스럽게 말해버렸다. "잘했어, 엄마" 신나는  부끄러움을 털어내고 싶었을지도 모를 엄마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엄마는 다시 설거지를 시작했고 나는 방에 들어가 책을 폈다. 우린 다른 일을 하면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테다. 눈에 띄게 그날 하루 말수가 줄어들었으니까. 머릿속에서는 치열하게 똑같은 장면만 생각하고 생각했을거다.  벚꽃비가 내리던  언덕을 넘으면서 최대한 천천히 걸음을 늦췄을 엄마를 상상했다. 제일  교문을 넘어 벚꽃나무를 올려다보면서 엄마는 '혜숙' 버리고 우리의 '엄마' 되는 장면. 상상하면 할수록 가방끈을 불끈 쥐고 올라갔을 엄마 손에 진하게 새겨져 있을 붉은 자국이 멍처럼 아팠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아무리 털어내도 잊히지 않았다.  당당한 씩씩함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마는 씩씩함이 좋았을까?


이후에도 엄마는 자주 당신의 씩씩함을 물었다. 주문과 같은 거였다. 절대 혜숙이었으면 못할 일들을 해낼 때마다 엄마는 씩씩함을 물었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몸집에 비해 너무 커서 헐거워 보이는 강철 옷을 엄마는 내가 20살이 넘어서도 자주 입고 다녔다. 엄마가 된다는 건 이런 걸까. 다소 무신경한 말로 누구나 다 엄마가 되면 그렇게 변한다는 식으로 넘겨보고 싶었다. 사람은 누구나 상황에 맞게 변하는 거니까, 엄마도 그렇겠지. 북받치는 애틋함보단 그냥 엄마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했는데...


참 운명의 장난처럼, 내 결혼식 날 엄마가 아닌 '혜숙'을 잠깐 만났다.

씩씩함보단 부끄러움이 더 잘 어울렸던 여자 '혜숙'을 그날 보고 말았다.

그동안 너무 보고싶었던 그 얼굴을 만났다.



늘 나에겐 아빠 자리는 공석이었다. 엄마와 나 동생 이렇게 세 식구가 똘똘 뭉쳐 살아가는 게 기본이었다. 엄마는 씩씩해야만 가족을 꾸려나갈 수 있는 가장의 역할을 맡은 지 벌써 20년이 다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혼한 이후 연락이 잘 닿지 않았던 아빠를 내 결혼식에 부르지 않기로 결정한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선택이었다. 엄마만 앉히고 옆자리 혼주석을 공석으로 비우려다 큰 외삼촌이 대신 앉아주셨다. 참 이상하게도 외삼촌 연락이 반가웠다. 외발서기를 한 것처럼 위태로워 보여 잡아주고 싶었던 엄마가 잠시뿐이지만 기댈 수 있는 지지대를 얻은 느낌이랄까.


엄마도 나랑 비슷하게 느낀 것 같았다.

오늘만은 혼자서 씩씩하지 않아도 돼.

오롯이 혼자 단단하게 헤쳐나가지 않아도 돼.

그동안 잔뜩 이고 지고 온 짐을 잠시 나눠 들어줄 이를 만난듯 편안하게 보였다.


결혼식날 엄마는 씩씩하고 당차던 '엄마'가 아닌 수줍은 많은 '혜숙'으로 돌아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혼주 자리를 지켰다. 원래라면 빈 공백을 매우려 더 밝게 더 씩씩하게 행동했을 엄마가 그저 편안하게 웃고만 있었다. 어색하고 고단했던 모습보단 훨씬 엄마에게 더 잘 어울리는 모습, 내가 어렸을 때 원래 알던 엄마의 모습. 그건 잃어버린 게 아니라 간직하고 있었던 엄마의 수줍은 모습이었다. 기쁘면서도 이상하게 슬펐다. 생활이 눌러버린 '혜숙'으로 돌아오기까지 20년이 걸린 것만 같아서. 또다시 내일이면 씩씩한 엄마로 힘주어 걸어가야 할 엄마의 일상에 괜히 미안해서. "그동안 미안했어 엄마, 그냥 미안했어." 전하지 못할 말들만 입가에 맴돌았다.



신혼집에 들어오고 나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밥 먹었어?"

코로나 때문에 늘어진 걱정을 잔소리 같은 당부로 이어가다 문득 덧붙이고 싶은 말이 생각났다.

"아 엄마 그리고... 씩씩하지마, 이젠 안 그래도 된다."


"뭐라카노? 엄마 잘 못 들었는데 뭐라고?"

"아니 그냥 그렇다고 알겠재?"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나는 이제 씩씩한 엄마보단 부끄러워하는 '혜숙'을 더 자주 만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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