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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Mar 15. 2020

쓰지 않는 말, 나에겐 없는 말

이주란 '한 사람을 위한 마음'

그래서 자주 안 쓰는 말은 뭐야?


친구가 술에 취해 물었다. 평소 습관처럼 쓰는 말은 반나절 정도만 집중하면 찾아낼 수 있었다. 자주 안 쓰는 말이라니. 친구는 소주 한 잔을 들이켜더니 삐딱하게 말한다. 우린 생활이 너무 좁아. 둘은 더 이상 맥주를 마시지 않았고 말이 없어졌다.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만 휘휘 저었다. 김 빠진 맥주에서 뜨문 올라오는 기포가 느리게 탁 터졌다. 안 쓰는 말을 찾아내려면 왠지 말을 해선 안 될 것만 같았다. 대화가 서서히 죽어가던 밤 11시, 우린 의자를 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도착해 샤워를 하면서 질문을 곱씹었다. "자주 안 쓰는 말"이라니. '자주'에선 내가 보였지만 '안 쓰는 말'에서는 어김없이 내가 달아났다. 발견한 듯 애써 초점을 잡아보면 어느샌가 뒷길로 사라졌다. 뒤통수에 붙은 새치 같아. 안 보여서 몰랐다고! 들어주지도 않는 변명만 나직이 뱉으며 살짝 짜증을 부렸다. 술에 취해 기억도 못할 말들만 남긴 채 다음 날 친구는 카톡이 왔다. "잘 들어갔어? 어제 기억이 하나도 안나."


친구 덕에 숙취보다 여운이 강한 질문을 하루 종일 안아버렸다. 기억도 못할 질문은 왜 해서는. 교실에서 하던 꼬리잡기가 생각났다. 맨 앞에 선 나는 잡히지도 않는 재빠른 꼬리를 잡으러 다닌다. 손에 닿으려고 하면 몸을 틀어버리는 상대를 향해 쭉 뻗은 손 끝. 안 쓰는 말은 그렇게 손에 닿을 듯 닿지 않았다. 하루 종일. 친구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래서 너는 자주 안 쓰는 말이 뭔데?"

"무슨 소리야"

친구는 더 이상 답이 없었다.


엄마 또한 어쩔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을 것 같다. 우리는 궁지에 몰렸을 때 찾아오는 온정의 손길과 가족 간의 사랑으로 그간의 어려움을 지나왔다. 그러면서 대출을 끼고 살던 집이 전세가 되고 월세가 되는 동안 주변으로부터 게으르다는 평을 받았다. 우리가 회사에서 어떤 일을 겪고 쫓겨났는지 어디가 아파서 얼마를 썼는지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 얼마의 빚을 졌는지는 몰랐지만 회사에서 겪었을 일은 참아야 했고 아프기 전에 조심했어야 했고 대학 같은 것은 포기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두세 개씩 일을 하며 살았어야 남들 앞에서 당당하게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거라고 말이다. (106쪽,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


자주 안 쓰는 말을 외려 내게 가장 많이 노출된 말이 아닐까. 너무 가득 차서 도저히 쓰지 못했던 말들. "말해 뭐해-" 웃어넘길 가벼운 말들이 아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들. 나에겐 '아버지'가 그랬고 '가난'이 그랬다. 남들이 '아버지'를 이야기할 때 나는 입을 닫았다. 오히려 대화의 주제가 아버지로 쏠릴까 봐 어느 순간 나에게 튀어올까 봐 지레 겁먹고 화제를 돌리느라 바빴다. 누군가에겐 '가난'이 회고의 소잿거리로 사용됐을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아니었다. 여태껏 가난 한 복판에 놓여 있었기에 '가난'을 생경하게 보지 못했다. 쓰지 못했다.


이주란 소설 <한 사람의 마음>에서는 '가난'이 없다. 등장인물들이 가난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일상이라서다. 구태여 '가난'이라는 말을 보태지 않는다. 그저 지난하게 살고 있는 주인공들이 살아가는 하루를 담았다. 당당하게 맞서는 게 아니라, 영웅같이 극복하는 게 아니라 그냥 살아간다.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우리네처럼.


죽은 언니를 대신해 조카를 키우고 있거나, 하굿둑 옆에 붙어 있는 쑥을 뜯으러 간다거나. 몽골 노래 '흐미'를 틀어놓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거나, 가끔 깊숙이 넣어둔 유서를 조카 류서에게 들키기도 하면서. 그냥 그렇게 그들의 일상은 흘러간다.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함께 사는 것만 같았던 이주란 소설은 '가난'을 구미 당기게 돋우지 않는다. 밍밍한 듯 본연의 맛을 살린다. 한 편으론 정갈하기까지 하다. 일상은 무의미하기에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는 걸 아는 듯이.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언제든 말할 기회가 널려 있지 않느냐. 당연한 듯 말의 자유를 이야기하지만 '트렌드'를 맞이하지 못해 사장되고 마는 말들에 대해. 사람들에 대해.  


소설에선 가난을 지니고 있는 자, '트랜디 하지 못하게' 묵묵히 생활을 꾸려나가 그냥 삶이 되어버린 자들을 담담하게 담아냈다. 그동안 왜 너를 알리지 않았어,라고 그들에게 채근하듯 묻는 다면 조용히 이 책을 건네주고 싶다.


화를 내지 않아서, 자극적이지 않아서, 뛰쳐나가지 않아서 이주란의 소설은 또다시 말의 풍년 속에 묻혀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더욱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꾸준히 소설집을 읽어 내려갔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소설집에 첫 번째로 실린 <한 사람을 위한 마음>에서는 언니 조수영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난 후 동생 조지영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후 몇 편의 단편이 지나고 <사라진 것들 그리고 사라질 것들>에서 또다시 언니 조수영과 동생 조지영이 등장한다. 이번엔 반대로 동생이 죽고 난 뒤의 언니의 이야기로. 둘은 동일인물일지도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서로의 죽음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못하고 일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자매처럼 닮아 있었다. 극적이지 않아서 슬픔이 생활에 침전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짜장면을 먹다 말고 언니 조수영은 운다.  오이를 썰다 말고 동생 조지영은 운다. 멈출 수 없는 생활, "아무튼 흘러가야만 하는 일상"이 그들에겐 있기에.


이를테면 조지영은 이거 하나는 알고 있었다. 어떤 죽음이 꼭 극적일 필요는 없으며 그러므로 그 후에도 별다를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 말이다. 그날, 조수영은 투표를 했고 그 일이 일어났다. 아마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모두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179쪽, 사라진 것들 그리고 사라질 것들)


힘들 때 잠깐씩 나는 배우고, 지금 연기를 하고 있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곤 했는데요, 이제는 진절머리가 납니다. 연기였으면 저는 아마 최선을 다했을 거예요.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배역을 사랑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러기가 싫었습니다. 제가 저같이 살아온 삶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그게 진짜 제 삶이었으니까요. (275쪽, H에게)


특별하게 전시하듯 내어 보이지 않는 일상 속엔 '안 쓰는 말'들로 가득하다. 쓰지 않아서가 아니라 몰라서가 아니라, 차마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고이 접어 차곡차곡 넣어둔 말들을 꺼냈다간 근근이 지켜온 일상을 무너트릴 수 있기에. 마지막에서야 "그게 진짜 제 삶이었으니까요"라고 고백하듯 말하는 이주란의 소설은 그래서 더 믿음이 간다. 다시 들춰보게 만든다.


누구도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는 시대가 왔다. 잠시만 멈춰서 들어달라 여기 주목할 만한 무언가가 있다, 이주란 소설은 함부로 부탁하지 않는다. 그냥 그 자리에서 묵묵히 누군가를 기다리며 꾸준히 관찰하고 그린다.


곁에서 들어줄 누군가에게 꼭 이 소설이 닿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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