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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Jan 27. 2021

나는 C마트 '캐샤'입니다

엄마의 노동을 기록하다

(*엄마의 입장에서 쓴 노동 르포르타주 입니다.)


나는 남편과 이혼 후 동네에서 제일 큰 C마트에서 10년 동안 '캐샤'로 일했다. 홀로 세 식구의 가장 역할을 해야 했던 탓에 결근 하나 맘 편히 하지 못했다. 빽빽하게 짜여 나오는 삼 교대 근무 중 휴무일은 한 달에 2번. 노동은 칼 같은 시급제로 계산됐다. 하루 최대 8시간 근무하면 38,880원(2013년 기준)을 받았다. 그마저도 하루 빠지면 없는 돈이었다. 10년간 반복된 업무는 간단했다. 계산대 뒤에서 손님이 가져온 물건을 '로스 없이' 바코드 찍고 계산하기. 언젠가부터 걸음걸이만 대충 보고도 자주 오는 손님을 '눈치껏' 알아채는 요령도 생겼다. 일하면서 지나치게 발달한 눈치는 대부분 '좋은 것'이었지만, 가끔 '안 좋은 것'으로 변하기도 했다.

특유의 터벅터벅 뒷굽을 끄는 발소리와 8자 걸음. 시선을 마주치진 않았지만, 심장이 먼저 반응해 쿵쾅대고 손이 덜덜 떨렸다. 멀리서 카트를 밀고 오는 손님은 나와 동료 언니들을 간간이 괴롭히는 '민원왕' 손님이었다. 남들에게 나쁜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살았지만, 그를 만난 이후 자주 '친절교육대상자'가 되었다. 손님은 매번 내 이름으로 민원을 걸었다. 그는 물건을 잔뜩 가져와서는 계산을 하는 동안 팔짱을 끼고 지켜봤다. "왜 안 웃으세요?" 처음 들었던 민원은 이런 식으로 시작됐다. 난 웃었고, 손님은 성에 차지 않는다 말했다.

웃음에 대한 민원 3번, 공손히 두 손으로 돈을 안 받는다는 민원 1번, 감사하다는 말이 없었다는 민원 1번, 총 5번. 제대로 쉴 시간도 없는데 따로 불려 가 '친절교육'을 받느니 그가 오면 가짜 웃음이라도 활짝 지어보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손님은 불만 어린 목소리로 이름을 물었다. 노란 스마일 배지 옆 명찰이 있어도 꼭 큰소리로 되물었다. "이름이 뭐요?" 그는 어김없이 돈을 계산대 앞에 휙 던지고 사라졌다. 미리 내뻗은 내 손은 민망해할 새도 없이 바닥에 떨어진 동전들을 줍는다. 그는 악성 민원인이었지만, '손님은 왕'이라는 본사 지침 탓에 나만 매번 '친절교육 대상자'가 되었다.

친절교육은 그다지 체계가 있는 건 아니었다. 캐셔를 관리하는 젊은 매니저에게 불려 가 사무실 구석에서 '경고'를 듣는 것으로 끝이 났다. "조혜숙 씨 이번이 5번째인 건 알고 계시죠? 벌점 깎겠습니다." 벌점이란 캐셔들 근무태도를 매기는 점수 체계다. 민원이 들어오면 1점씩 깎였다. 3점 이상이 되면 보너스도 함께 깎였다. 남들이 월 5만 원 더 받을 때 만원만 받는 식이었다. 매니저는 짧고 묵직한 경고 끝에 익숙한 벽보 하나를 손으로 짚는다. "혜숙 씨 이번 달 테스트도 84등이네요. 손이 그렇게 느려서야. 잘 웃고 계산 빨리빨리 하시고. 아시죠?"

벽보에는 1등부터 100등까지 등수가 매겨져 있었다. 테스트는 한 달에 한 번씩 진행됐다. 1분 동안 누가 더 많은 양의 제품 바코드를 찍는지, 제품의 수량이 등수를 가렸다. 학창 시절에도 보지 못했던 등수 표는 매달 나와 같이 손이 느린 '캐셔 언니'들을 괴롭혔다. "다음 달에도 90등 밖으로 넘어가면 따로 남아서 연습해야 된대." 휴게실에서 언니들과 모이기만 하면 왼손과 오른손을 교차하며 제품 바코드를 찍는 연습을 했다. 벌점에 낮은 등수까지, 몇 년을 근무해도 능숙해지지 못하는 무딘 내 탓이라 생각했다.

C마트 지점장이 오는 날에는 계산대 주변과 복도까지 청소를 깨끗하게 해야 했다. 매니저들이 눈에 불을 켜고 계산대 앞을 감시했다. 더러운 곳이 발견되면 손님 앞에서도 "여기 더럽잖아요!" '쫑크'를 맥였다. 청소는 번외 근무였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다. 깐깐한 눈길을 통과해 청소를 끝내 놓으면 지점장이 왔다. 지점장은 의례 하는 말들 끝에 꼭 불편한 점이 없냐는 질문을 덧붙였다. 그의 선한 인상을 칭찬했던 친구 미란이 자주 용기 내어 손을 들었다. "지점장님, 저번에도 말씀드렸는데... 손님이 없으면 앉을 수 있게 작은 의자 하나씩 주시면 안 될까요?"

C마트 캐셔는 손님이 없을 때도 서서 기다리는 게 원칙이었다. 우리는 계산대 뒤에서 4시간씩 서 있는 동안 다리가 퉁퉁 부었지만 '의자에 앉으면 나태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본사 지침 때문에 의자 하나 받지 못했다. 지점장은 생각해본다는 말과 미소를 뒤로 하고 자리를 떠나곤 했다. 몇 달 동안 반복되는 건의와 무응답의 쳇바퀴. 오매불망 기다려도 의자는 결국 오지 않았다. 앉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은 그로부터 5년 뒤, 나와 미란이 마트를 그만두고서야 이루어졌다. "저 쪼깨난 접이식 의자 하나 주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땐 안 줬나 몰라." 그만둔 이후 마트를 방문할 때마다 계산대 뒤에 숨겨진 접이식 의자를 유심히 보곤 했다.



10년간 '캐샤' 살이는 힘들기만 한 건 아니었다. 마트엔 '입사 멤바'이자 나이가 같은 동료들이 많았다. 'C마트 63 토끼 모임'도 만들 만큼 친구들이 곁에 있어 그나마 견딜만했다. 대부분 나와 같이 경력이 없는 '아줌마'들이었다. 40대 중반, 이 나이에 뽑아주는 데가 없어서 왔다는 미영이, A재단이 있는 C마트는 돈을 떼먹지 않을 것 같아서 들어왔다는 현숙이, 이혼 후 아이를 거둬먹여야 해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영자까지. 간혹 30대 중반 젊은 사람이 캐셔로 같이 뽑혀도, 사무직이나 정산서에 우선 배정하기 때문에 항상 내 또래의 아줌마들만 '현장직' 캐셔로 남았다. 언젠가 "생계형 아줌마들을 뽑으면 군말 없이 일 잘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던졌던 매니저의 말을 기억했다. 다 같이 하하 웃어도 나만 웃지 못했던 쓴 농담이었다.

C마트를 다닌 지 11년이 되는 봄에 퇴사를 결정했다. 이제 겨우 일에 '질이 나기' 시작했는데 그만둔 이유는, 줄어들 줄 모르는 일의 강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10년 동안 밥 먹듯 재발 되는 다리 부종 탓도 아니었다. "하필 그때 친정 오빠한테 들킬게 뭐고" 아직도 미란에게 '그날'을 이야기하면 눈물부터 먼저 맺혀버렸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24번 계산대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물건 값에 로스가 생겼고 CCTV를 지켜보던 매니저가 달려와 자초지종을 묻고 있던 참이었다. "다음 손님은 얼른 계산해달라고 성화지, 머리는 백지장처럼 하얘지지, 매니저는 로스에 대한 사유서를 써달라 하지, 머리는 자꾸 숙여지는데, 하필 그때 친정오빠가 멀리서 보고 있더라니까"

오빠는 내게 3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이었다. 혼자 생계를 책임지는 게 아무리 힘들어도 오빠에게 힘든 내색 하나 내지 않았다. 괜한 걱정과 부담을 주기 싫었다. '괜찮다'는 말로 다독이며 10년을 잘 쌓아오고 있었는데, 연락도 없이 찾아온 오빠에게 '날 것' 그대로를 들키고 말았다. 우리 둘은 눈이 빨개진 채 서로를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 ‘내 자리’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내가 오래 머물 수 있는 ‘밥벌이’를 찾고 싶단 욕심이 생겼다. 하루 벌어 하루를 겨우 사는 것 같았던 내게 ‘캐셔’는 소중한 일자리였지만 내가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돈 버는 걸 멈춰선 안 됐다. 딸들이 자리 잡을 때까지 최소 10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 동안 돈을 꾸준히 벌어야 했다. 그러려면 더 나이 들기 전에 몸과 마음이 ‘빨리 닳지 않는’ 직장으로 옮겨야 했다. 운이 좋게도 사정을 아는 친구 주연이 ‘앉아서’ 일할 수 있는 작은 관리사무소 경리직 자리 하나를 소개해줬다. 월급은 100만 원 언저리로 평생 동결되어있는 ‘무기 계약직’이지만 ‘내 자리’란 확신이 생겼다. 자리가 마련되고 나서 곧 C마트를 그만뒀다.

"그래도 혜숙아 요즘 '캐샤'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니까, 옛날처럼 퇴근하고 밤에 불러내서 재고정리는 안 시키잖아" 이제 그만 나가 달라는 눈치 속에서도 꿋꿋하게 정년을 채울 거라는 63 토끼 친구들은 여전히 C마트 '캐샤'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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