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인 Feb 02. 2021

사랑이 고픈 아이에게 '엄마'가 되어주고 싶어

위탁모 미애 씨 이야기

(*위탁모 미애씨(가명)를 인터뷰하고 작성한 글입니다.)


"48살부터 시작했지. 지금 60이 넘어가니까. 내 중년의 세월은 애기들하고 흘러간 거야." 

부산에 사는 미애(61)씨는 홀트재단 위탁모 일을 13년 했다. 위탁모란 입양이 될 때까지 친부모를 대신해 아기의 '엄마' 역할을 해주는 사람을 의미했다. 보통은 아기가 태어난 후 100일, 입양이 잘 되지 않으면 돌을 넘겨서까지 '위탁모'신분으로 아기를 봐주곤 했다. '배꼽 떼자마자' 받은 아기를 돌본다는 건, 수입을 내는 '일'로만 생각하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일 처음 월급이라치면 50만 원 받았는데, 초반에는 아기용품 지원을 안 해줘서 기저귀 사고, 물티슈 사고, 물세 내면 다였지 뭐. 어째 보면 쪼끔의 '수고량(수고비)' 택이지. 봉사정신 아니면 못한다." 

3개월마다 아기가 입양 가고 다시 신생아 엄마로 '리셋'되는 위탁모 삶은 녹록지 않았다. '좋은 일, 봉사 정신'으로 마음을 다잡기엔 정신이 혼미한 순간들이 많았다.

"잠 못 자는 게 제일 괴로웠지. 2시간마다 일어나서 분유 맥여주고, 칭얼거리면 일어나서 돌봐줘야 하고. 사람이 밤에 잠을 잘 못 자면 머리가 빙글빙글 돌더라고. 낮에 잠깐 아기 자면 쪽잠으로 보충했지. 외할매(미애씨 엄마)는 첨에 위탁모 일을 한참 반대했어. 나이 먹어서 젊은 사람도 힘든 그 고생을 왜 사서 하냐고." 


미애 씨는 그런 걱정을 받을 때마다 "그러게, 이 일은 왜 하고 있노? 왜 하지?" 메아리처럼 혼잣말을 되뇌었다. 일을 시작하면서 생활 패턴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밤잠을 푹 못자는 건 '중년의 몸'이 버텨내기 어려웠다. 살이 두 달 사이에 10키로나 '푹푹' 쪄버렸다. "그래도 있다아이가, 살이 쪄서 애기가 품에 '폭삭하니' 더 쏙 들어오는 건 좋더라.(웃음)" 살이 쪄도 아기에게 좋은 일로 '고마' 웃어 넘겨버리는 미애씨는 매일이 고비였지만, 이상하게도 매년 위탁모 일을 놓을 수가 없었다. 


평생 아들 둘 키우는 주부로 살다 50살 다되어 처음 선택한 일이 '위탁모'였다. 소소하게 돈벌이를 하고 싶기도 했지만, 이왕이면 '살면서 한 번이라도 좋은 일'을 하고 싶었다.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진실이었다. 사실, 미애 씨는 '좋은 일'이란 걸 하면서 혼란스런 내 마음을 '닦고' 싶었다. 어떤 대단한 사명감보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 먼저 미애씨 마음을 움직였다. 


"우리 집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바깥에서 사고를 많이 쳤어. 정신을 못 차리고 다녔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오토바이 타고 다니면서 죽을 고비 여럿 넘겼거든. 말로 표현 못할 만큼 맘고생 심했지. 이러다 내가 망가질 것 같더라고. 마음 다스릴 곳이 필요했던 거야. 누구한테라도 봉사를 하고 싶었어.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마음을 쏟아내다 보면, 내 안의 어떤 답이라도 얻을까 싶어서." 


미애 씨의 혼란스러운 마음은 이상하게도 아기들과 함께 있으면 잔잔하게 가라 앉았다. 칭얼칭얼 거리던 아기도 미애씨 배 위에 올려서 몇 번 꼭 안아주다보면 찌푸린 얼굴이 어느새 '뽀얗게' 피어났다. "인연따라 흘러간다." 습관처럼 되뇌였던 말이 맞다면, 미애씨와 아기는 끊지 못할 '연'이 있는 게 분명했다. 평생 잘 안풀리는 가족 문제도 결국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일'일 뿐이었다. 작은 믿음들이 마음 속 잔뿌리를 내리자 미애씨의 혼란스런 마음은 예전보다 단단해졌다. 몸이 점점 버텨내지 못해 얼른 일을 그만두자고 마음먹어도, 문득 '애기 냄새를 맡고 싶고, 애기와 눈을 맞추고 싶고, 애기를 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롯이 나를 닦는 수행으로부터 시작한 일은 '업'이 되어 돌아왔다.  


"사실, 이런데 오는 아기들은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하거든. 말 못 하는 아기라도 칭얼대면서, 자꾸 뒤척이면서 자기표현을 하는 거지. 아마 엄마 뱃속에서부터 삶이 많이 불안했을 거야. 불안을 상쇄해줄 수 있는 건 결국 그 이상의 사랑인 거야. 100프로의 사랑이 아닌 120프로의 사랑. 10번 안아줄 거 20번 안아주려는 거, 우유를 먹일 때 좀 불편해도 품에 안고 먹이는 거. 뭐 그런 거. 아기를 돌보는 순간만큼은 아기한테 모든 사랑을 쏟아붓는다. 이건 아기가 불쌍해서가 아니야. 내 품에 들어온 이상 내 새끼인 거지. 어떨 땐 내 새끼보다 더 신경 쓰면서 돌보는 거야." 

미애 씨 품을 거쳐간 아기가 어느덧 60명이 넘었다. "남들이 보기엔 똑같이 보여도 나는 누군지 다 구분한다." 아직도 미애 씨는 핸드폰 사진첩에 가득 찍힌 아기의 이름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했다. 미애씨는 13년간 일을 하면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있다면 '불쌍하다'였다. 가끔 위탁모 일을 대충 이해한 이들이 아기를 향해 내뱉는 말은 공감도, 위로도 뭣도 되지 않았다. 그저 불쾌하기만 했다. 


"어느 부모가 내 새끼 앞에서 불쌍하다는 말을 하는데,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냐. 바로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지, 아기 듣는데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닙니다 하고. 어릴 때부터 그런 대접은 받으면 안 되는 거잖아. 아기라도 어리더라도 어느 누구도 함부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판단하는 건 안 되는 거야." 


입양이 쉬운 길은 아니지만, 꼭 아기에게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친부모가 키울 여력이 안되면 아기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부모 밑으로 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언젠가부터 아기가 있을 자리는 운명처럼 이미 정해져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친부모가 아니더라도, 그 아기의 부모가 될 사람과는 어떤 인연이 있지 않을까 싶어. 몇 년 전에 입양 보낸 아기 정윤(가명)이는 한쪽 머리가 태어날 때부터 조금 납작했어. 이게 보통의 가정에서는 별 문제가 없는데, 입양아들은 좀 다르거든. 두상이 똥글똥글하지 않으면 방치된 것처럼 생각하니까, 입양 갈 때 좀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아. 그래서 혹시나 정윤이가 입양 안될까 걱정이 많았지. 다행히 입양할 부모가 '딸내미는 머리 땋으면 별 표시 안 난다'라고 괜찮다고 하는 거야. 그러고 한참을 얘기하다가 저 멀리서 10살짜리 친아들이 걸어오는데, 아들도 한쪽 머리가 조금 납작한 거야. 세상에, 너무 놀랐어. 이런 게 인연인가 싶고. 정윤이가 머물러야 할 자리는 거기였던 거지."


미애 씨는 13년 동안 크고 작은 우연들을 겪으면서 '부모와 자식 간의 연'이란 것에 믿음이 생겼다. 아기를 보내고 나서 마음이 헛헛할 때마다 작은 위로를 얻곤 했다. 10년 넘게 나름 위탁모 삶에 적응했다지만, 매번 입양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서는 괜히 눈물이 났다.   


'어미 모(母) 자가 진하게 새겨진 위탁모 일'을 하고 있지만, 입양은 아직까지 '엄마'에게만 주어진 몫이 컸다. 몇 년 전 입양법이 바뀌면서부터 엄마가 감당할 부담이 더 커졌다. 바뀐 입양법에서는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 일주일 동안 엄마 호적에 아기 이름이 올랐다. 보통은 임신 과정에서 아기 아빠와 헤어지는 경우가 많아 '아기를 낳아야 하는 엄마'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생명을 존중하는 좋은 취지 덕에 종종 입양을 취소하고 다시 데리고 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오히려 호적에 드러나는 게 두려워 '베이비박스'를 선택하는 이들도 더 많이 생겼다. 

"여자는 자기 몸에서 바로 일어나는 일이라 혼자 발만 동동 거리는 거야. 내 아들내미 보다 훨씬 어린 여학생이 산후조리도 끝나기도 전에 퉁퉁 부은 몸으로 아기를 데리고 오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찡하지. 아기를 낳고 돌보고, 보낼 때까지 과정은 오롯이 어린 엄마의 몫이겠지. 과연 입양법은 누굴 위해 이렇게 바뀌었나 싶어. 위탁모들끼리 모이면 항상 법이 허점 투성이라는 얘기를 하지."


잔잔하게 이야기하며 13년을 돌아보던 미애 씨는 입양법 얘기를 하면서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2년 전, 부산에 홀트재단이 갑작스레 없어지면서 미애 씨는 어쩔 수없이 위탁모 일을 함께 정리했다. 말그대로 '시원섭섭'했다. 그동안 미애씨는 자기만의 시간을 거의 가질 수 없었다. 바깥에서 바람이라도 잠깐 쐬고 싶으면 아기를 어디 맡겨야 하는데 그럴 수도, 그러고 싶지도 않아서다. 미애씨 집에 놀러온 친구들은 종종 말했다. 애도 다 키운 중년은 좀 편안하게 자기를 위해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돈도 별 되지 않는 힘든 일 왜 굳이 사서 하냐고. 그럴 때마다 미애씨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어느 누군가는 결국 해야 하는 일 아니겠나. 그거 그냥 내가 할란다." 

미애 씨는 요즘 초록우산에서 하는 위탁가정을 신청하기 위해 알아보고 있다. 미애 씨가 여전히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사랑이 고픈 아이에게 '엄마'가 되는 일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C마트 '캐샤'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