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도입부 읽고 짧은 리뷰
삶은 커다란 덩어리가 아니다. 어느 체제나 이념으로 왕왕 묶인 것들도 들여다보면 대게 사람과 사람의 울음, 웃음이 섞인 감정, 말 못 할 고민, 별거 아닌 농담과 유머 들이 그저 '있는' 상태다. 작은 점이 점과 점으로 모인 다고 해도, 점은 점일 테지만. 누구는 그저 그런 상태를 무리하게 때론 위대하게 하나로 묶고 싶은 것이다. 소란스러운 말 따옴표들은 쓸모가 없으니 삭제. 제목은 '위대했던 어느 날'. 그게 폭력인 줄도 모르고 작은 우리는 '큰 사람'이 되지 못해 작디작은 말들을 습관처럼 숨기곤 했다.
"이념에 큰 사람은 쓸모없고 불편한 존재라는 것을. 큰 사람은 완성되는데 손이 많이 간다.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을 찾는다. 작으면서도 큰 사람.(38쪽)"
"작으면서 큰 사람, 그가 직접 그 사실을 말해줄 것이다.(38쪽)"
언젠가 저녁을 먹고 친구 현과 티비 앞에 앉았다. 쓸 데 없는 소리란 게 있을까.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따고 소파에서 유 퀴즈를 보던 현이 말했다. 편집점을 찾기 어려울 것 같아. 저 많고 깊은 이야기들을 끊어내기가. 한 인터뷰어의 이야기에 푹 빠져 눈물을 글썽이던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현이 시청하고 있던 유 퀴즈에서는 경북지역 전문 리포터가 나왔다. 그는 오랜 세월 경북에 있는 시골들을 방문해 할머니, 할아버지와 인터뷰를 전문으로 했다. 호탕한 웃음소리와 장사하는 이 같은 현란한 말솜씨에 가벼운 볼거리를 짐작했던 우리는 곧 목이 매이고 만다.
그는 말했다. 어떤 집에 도착하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그의 추론은 근거 없는 감각이거나 때려 맞추기 식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죽음을 직감하면, 다 쓰지도 못할 나무 땔감을 한가득 베어 집에 쌓아 둔다고 했다. 할머니는 장독에 장을 가득 담아둔다고 했다. 노부부는 내가 없을 때의 남은 배우자가 겪을 삶의 일부를 미리 걱정한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넘치게 한다. 리포터인 그는 시골집 한쪽에 가득 쌓인 나무 땔감과 넘쳐나는 장독을 말없이 가만가만 살폈으리라.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쓸모없는 이야기란 없어.
현의 질문에 나는 겨우 답을 했다.
유 퀴즈를 보면서 나는 자주 쓸데없는, 쓰임새를 딱히 갖추지 않은 이런 이야기를 오래 기억했다. 햇빛의 잔상이 눈길이 머무는 물건에 옅게 찍히듯 생활을 마주할 때마다 이야기가 진득하게 묻어나곤 했다. 그저 '시골 노인의 죽음'으로 묶일 수 없는 작은 이야기. 대단하지도 않고 겨우 귀를 가까이 대야만 들을 수 있는 사소한 움직임과 언어들. 고난을 마주하고 꾸준히 살아내야만 나올 수 있는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살아있었다. 삶의 실제란 멀리 있지 않았다.
작가가 전쟁통에 생략된 여성의 목소리들을 담으려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됐다. 수십 번의 출판 거절을 듣고도 세상에 이야기를 내어준 작가의 용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두터운 책을 읽어 내려간다. '작으면서 큰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란 감히 살지 않은 이가 짐작도 하지 못할 장면과 언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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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