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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Oct 18. 2021

좋은 게 좋은 거지가 되지 못하는 거지

책 얘기 하나도 못꺼낸 10월 어느 날의 독서모임 기록

한파주의보가 예고된 전날 밤, 담이와 나는 서울 한복판에서 만났다. 여름이라기엔 쌀쌀했고, 겨울이라기엔 몸 사이를 뱅뱅 도는 미열이 더위를 느끼게 했다. 이게 가을이었던가. 일 년에 잠깐 왔다가는 가을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육 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다이어트를 이어온 담이 유지어터를 선언한 지 두 달째. 오랜만에 찬기운이 도는 바람을 핑계 삼아 나는 담에게 소주와 조개찜을 제안했다. 느끼한 파스타에 곁들인 맥주, 잠시 붓는 조미료 같았던 레드와인 몇 모금 말고. 우리가 본격적인 술을 마셔본 적이 있던가. 


코로나 생기기 그 예전에 우리는 담이 학교 앞 작은 칵테일 바에서 시린 손을 비볐던 기억이, 그 언젠가는 술을 한잔하고 나서 노곤해진 내가 노래방에서 꼬박 한 시간 잠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전부 20살의 기억이었다. 그러고 나서 처음인가 설마. 기나긴 각자의 술 역사에 비해 우리가 함께 한 술 역사는 매우 초라했다. 뿌연 기억 끝에 담이는 오래간만에 마시는 소주에 설렘마저 느낀다고 말했다. 


오후 5시. 재택근무를 하는 담과 비교적 일찍 마치는 내가 들린 조개찜 가게는 한산했다. 잘못 온 게 아닐까. 괜히 지나가는 행인인 척 가게 안 동태를 살피지만 주인장은 힐긋 쳐다만 볼 뿐 특별한 호객행위를 하지 않았다. 


주인이 엉덩이도 떼지 않네. 아쉬움이 없다는 게 진정한 맛집인거야.

코로나 때문에 사람이 없는 게 차라리 낫지 않나. 


어차피 다른 곳에 갈 생각도 없었던 담과 나는 뒷걸음치며 다시 조개찜 가게를 들렀다. 아무도 보지 못할 구석을 차지했다. 썩 다른 이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던 우리의 자연스러운 발걸음이었다. 나는 조개찜 소짜 하나랑, 소주 하나를 주문했다. 무더웠던 여름 전에 본 게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그때 아마도 누군가가 여름이 끝나야 보겠네라고 했고, 상대는 에이 설마- 그전에 볼게 될 거라며 괜한 허풍을 떨었다. 말만 남은 누군가의 예상이 맞아떨어지는 지금, 벌써 여름이 훌쩍 지나 10월 중순이 지나고 있었다. 


사실 우리는 책 모임을 핑계로 만났다. 이미 채 읽지도 못한 두툼한 책 한 권씩 가방에 준비되어 있었다. 다 읽고 만나기엔 영영 못 만날 것만 같아서 여력이 되는 만큼만 리뷰하자는 나의 제안 탓이었다. 마치 하지도 못할 구몬 숙제를 한 가득 짊어지고 도서관을 향했던 어느 꼬마 시절처럼, 우리는 여전히 똑같은 실수를 지겹게도 반복했다. 그래야 마음에 안심이라도 될 테니까. 사장님 여기 소주 한 병이요. 오늘도 역시나 책 모임은 물 건너갔음을 직감했다. n년차 직장인 담과 나는 책 읽을 시간이 없단 핑계를 댔다. 어설픈 변명은 소소한 독서모임을 뿌리째 흔들었지만. 


이번 주 우리 독서모임이었지? 그냥 다음 주로 할까.

그래 다음 주에 하자.

아니, 우리 그냥 한 달 쉬어버릴까. 쉬는 게 아니라 각자 읽고 모일까. 서두를 필요 없잖아.

어휴 이해하지. 나도 이번에 10장을 채 못 읽었다니까. 


읽을 힘도 없다는 게 말이 될까. 소주는 달았다. 담과 내가 마주 보며 이야기하고 있던 주제가 더 썼을 테니까. 고작 몇 장 읽을 힘도 의욕도 내지 못하게 만든 이유는 뭘까. 몇 번은 피식 웃고 말았던 비겁한 핑계는 여름 이후 고질병처럼 담과 나의 삶에 눌어붙어버린 듯했다. 꽤나 상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했을 땐, 소주를 마셔도 머릿속에서 떨칠 수 없는 게 생겼다는 걸 알아챈 이후였다. 빈 조개껍데기가 하나 둘 쓰레기 통에 쌓이는 동안 나는 상사 박의 폭언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담은 오랜 고민이었던 결혼에 대해 말했다. 


지난 수요일, 상사 박과의 모임에서 나와 동료 선생님들은 두 시간 내내 박에게 폭언을 들었다. 내가 장인데 왜 너희들은 군말 없이 따라주지 않는 거니. 나와 동료가 어떤 말을 하려 하면 박은 목소리를 높였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법이 나았다. 20살 넘어서 누군가에게 혼이 난다는 기분은 꽤 모욕적이었다. 50살 넘은 동료 선생님에게는 더 충격적이었으리라. 50살의 동료는 그날 이후 몰래 엉엉 우는 날이 생겼고 정신과를 찾아가서 약을 먹기 시작했다. 


그 선생님이 그러더라고.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좋은 게 좋은 거지가 되려면 누가 험하게 망가지는 꼴을 봐야 하니까. 자꾸 외면하지 못할 일들이 생겨. 


담이가 고민 끝에 가입할 예정인 결혼정보회사의 설문지는 길고 길었다. 외모, 재력, 학벌, 성격... 중에 제일 중요한 두 가지를 고르시오. 담이 보여준 캡처 화면에는 담이 고심해서 고른 답 2개가 있었다. 내 머릿속에서 대충 굴려봐도 2개만 찍어 맞추기 어려웠다. 어떻게 2개만? 결혼은 최선이 아닌 최악을 거르는 일이라는 평이한 말이 우스웠다. 우리는 결혼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잖아. 여유를 가져볼래. 담은 이전보단 편안한 표정으로 결혼을 말했다. 평생 같이 살 배우자를 감히 마지막만 재껴가며 고를 순 없었다. 담의 평온과 확신을 응원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 술잔 사이를 오갔다. 


왜 착하고 선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이.

왜 자꾸.

왜 계속.

왜 꾸준히. 


서른이 넘어서는 우연히 해결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불편한 결정을 내리는 연습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서로 다른 이야기의 결론은 같았다. 마지막 남은 소주를 마셨을 땐 이미 여덟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담과 나는 의욕을 빼앗아가는 쓸데없는 악의 무리를 쫓아내기 위해 비장해진 마음으로 2차 맥주집을 향했다. 취미 방랑자 담이 시작한 댄스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언젠가 호주에서 친구 정과 셋이 만날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더 하고 싶었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라는 말을 단호하게 해내기 위해선 곁에서 용기와 행복을 얻어야 했으므로. 좀 더 맑고 가볍고 내 의지로 움직이는 것들에 대해 신나게 말하고 싶었다. 문득 곁에서 같은 고민을 하는 담이 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여전히 각자 들고 온 책의 제목조차 모를 테지만 우린 꽤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 왠지 박에게 대차게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아. 


담과 나는 감자튀김 냄새를 풀풀 풍기며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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