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보다 보면 욕구(혹은 욕망)는 억누르거나 쫓아야 할 게 아니라 충분히 경험해야 할 대상이며, 그래야 그 욕구에서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다는 요지의 내용을 많이 본다. 그런데 이게 머리로는 이해가 가도 직접 ‘충분히’ 경험해 보는 게 쉽지가 않은 것이, 이 ‘충분히’란 말이 주는 모호함과 더불어 욕구를 ‘경험’한다는 게 어떤 건지 딱히 감이 안 올 때가 많기 때문이다.
자고 싶은 욕구를 ‘충분히 경험’한다는 건 무엇인가. 아 이만하면 개운하게 잘 잤다고 느낄 때까지 계속 자는 건가? 사흘 밤낮을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자다 깨다 했어도 ‘개운하게 잘 잤다, 이만하면 됐다’라는 실감은 나질 않던걸. 돈을 향한 이글이글한 욕망을 ‘충분히 경험’한다는 건 무엇인가. 돈이 주는 (그리고 주게 될) 즐거움과 기쁨에 나를 맡기고 돈 버는 생각에 몰입하는 건가? 하면 할수록 허황한 판타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걸.
그러다가 우연히 ‘충분히 경험하다’의 의미를 약간이나마 엿본 것 같은 일이 있었다.
당시 나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3평짜리 작은 작업실을 구해서 일을 하고 있었고, 오후 서너 시가 되면 일의 능률이 마이너스대로 떨어져서 그냥 동네 산책을 하며 머리를 비우는 게 일종의 루틴이었다. 발길 닿는 대로 동네를 구석구석 쏘다니며 맛있어 보이는 신상 빵을 머릿속으로 체크하고 새로 생긴 카페를 스캔하던 어느 날, 우연히 편의점에 들어갔다가 카라멜콘 땅콩 한 봉지를 사 들고 나왔다.
그날따라 웬 변덕이었는지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과자를 먹고 싶어서 그 순간 눈에 띄는 봉지 하나를 (평소엔 땅콩이 들어간 모든 음식을 먹지 않는 주제에, 그것도 큰 봉지로) 별생각 없이 집어 든 것이었는데, 아니 이럴수가! 충격적일 정도로 맛있지 뭔가! 하나만 먹고 나머지는 작업실 가서 먹어야지 하고 봉투를 뜯은 것이 무색하게 나는 작업실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길바닥에서 과자 한 봉지를 홀랑 다 먹어버렸다(길먹 최고). 그 달콤하고 바삭한 맛에 정신이 팔려서 죄책감 같은 건 단 1도 들지 않았다.
그 뒤로 난 정확히 5일 동안 오후 3시가 되면 편의점에 가서 카라멜콘 땅콩 한 봉지를 샀다. 그러고는 작업실에 앉아 과자 한 알 한 알을 입에 굴려 가며 음미하며 맛있게 먹었다. 부스러기까지 아주 싹싹. 이런 설탕 덩어리를! 이 큰 봉지를 한 번에! 그것도 며칠 연속으로! 이렇게 계속 먹으면 엄청나게 살찌겠네! 같은, 평소라면 얼마든지 할 법한 생각들은 머릿속에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저 이렇게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다니 난 정말 행복하다는 기쁜 마음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6일째 되던 날, 놀랍게도 카라멜콘 땅콩을 먹고 싶다는 욕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걸 발견했다. 오후 산책 시간이 되어 지난 일주일간 그랬던 것처럼 편의점에 들어갔는데 이 과자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단 과자의 맛과 향에 질린 것이 아니었다. 그런 불쾌한 뒷맛 같은 것이 전혀 없는, ‘이제 먹을 만큼 먹었으니 됐다’의 홀연한 감각이었다.
평소 꽤 식탐이 강해 언제나 먹을 것 앞에서 부족하거나 과하거나, 둘 중 하나를 느끼곤 했던 나에게 이건 경험해 보지 못한 제로(0)의 감각이었다.
그리고 알았다. 이게 ‘충족된 욕구/욕망은 사라진다’의 귀여운 예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깨달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카라멜콘 땅콩을 향한 나의 욕구가 이렇게 홀연히 사라진 것은 일말의 죄책감이나 걱정 없이 ‘백퍼센트 순도로 기뻐하며 음미’한 덕분일지도.
어떤 걸 원할 때, 욕망할 때, 조금의 걸림도 없이 백퍼센트 순도로 기뻐하고 즐긴 적이 있는가, 묻는다면 나는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간절히 원했던 걸 손에 쥐고 행복해할 때조차 2% 정도의 불순물 정도는 묻어있던 게 다반사였으므로. 온전하게 음미하고 기뻐하지 못하게 만드는 내 안의 잔잔한 죄책감과 불안이 불완전 연소한 욕망의 소용돌이를 만든 주범이겠다는 자각이 이 작고 귀여운 에피소드의 결말이다.
그래서 내가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욕구를 온전히 경험하는 기술을 연마했냐고?
아니, 죄책감 없이 순수하게 즐기게 된 맛있는 과자만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