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야, 나 행복도우미

by 몽상가


폭염이다. 여름은 더워야 여름답다. 그래도 너무 심하다. 심하다고 해서 할 일을 안 할 수 있나? 참고하려니 더 힘이 드는 계절이다. 그러나 자기 자리를 시끄럽게 지키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는 더위도 한풀 꺾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발길이 닿은 곳은 해남 오일장이다. 해날 오일장은 매월 1, 6, 11, 16, 21, 26일에 열린다고 한다. 시장은 생각보다 규모가 커서 다 둘러보는 데 시간이 걸렸다.

폭염 속의 오후는 열대의 기후와 흡사하다.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은 뙤약볕을 피해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버스정류장 그늘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어르신들로 가득했다. 폭염에도 장에 나왔다가 돌아가는 어르신들 일부는 지팡이를 짚고 계신다. 어르신들의 공통점은 장에서 산 물건이 들어있는 까만 봉지를 양손에 들고 있거나 시장 가방을 들고 계신다는 것이다. 버스정류장 안에 마주 보고 앉을 수 있게 양쪽으로 길게 만들어 놓은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정겨웠다.

어르신들 사이로 노란 조끼를 입은 여인이 등장하자 시끌벅적해졌다. 노란 조끼의 여인은 어르신들과 집안의 숟가락까지 다 아는 사이인 듯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목소리도 크고 쾌활하여 어르신들이 노란 조끼의 여인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 모인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더워도 너무 더운 날씨에 어르신들과 장시간 이야기 나누는 게 쉽지 않을 텐데 한 분 한 분 안부를 묻고 오늘은 뭘 사가지고 가시는지 물었다. 어르신들은 노란 조끼의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떡이며 옥수수를 나눠먹으면서 버스가 오기 전까지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노란 조끼의 여인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조끼 등판에는 행복도우미라는 커다란 글씨가 박혀있었다. 행복도우미라!

행복도우미가 어떻게 행복하게 도와주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이번 버스 사구, 사구 이쪽으로 나오세요. 거기 말고 저 앞쪽으로 가서 서세요.

노란 조끼 여인이 소리치자 버스정류장 안에 있던 어르신들이 하나둘씩 일어서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동이 편치 않은 분들이라 버스승강장까지 가는데 한참이 걸렸다. 버스가 도착하자 어르신들은 앞문으로 오르기 시작했고 뒷문으로는 노란 조끼 여인이 어르신들의 짐보따리를 싣기 시작했다. 노란 조끼를 입은 또 한 분이 나타나서 앞문으로 버스에 오르는 어르신들을 부축했다.

버스가 떠나고 다음 버스가 바로 왔는데 이번에는 거의 모든 어르신들이 그 버스에 오르신다. 버스 뒷문에서는 노란 조끼를 입은 남자분이 버스 밖에 있는 노란 조끼를 입은 여인에게서 전달받은 짐을 버스 안에 실었다. 승객이 가장 많은 버스인 모양이다. 총 3명의 노란 조끼를 입은 행복도우미들이 거동이 느리고 힘든 어르신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고 있었다.

버스가 떠나자 노란 조끼의 여인은 다시 버스정류장에 남아있는 어르신들과 가족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할아버지는 노란 꽃이 피어있는 화분을 하얀 비닐봉지에 넣고 버스를 기다리고 계셨다. 노란 조끼 여인이 오늘도 꽃을 샀냐고 물으니 할아버지 왈!

"밸 걸 다 사가도 좋은 소리 못 듣는디 요 꽃만 사가면 좋아라 해"

"아따, 오늘 가면 좋은 소리 듣겄소"

노란 조끼 여인과 할아버지 웃음소리가 햇빛을 따라 퍼졌다.

서울에서는 보지 못한 광경이라 문화충격이었다. 대도시의 생활과는 다른 느림과 여유가 시골에 있기 마련이지만 대놓고 행복도우미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광경은 다른 나라에 와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특히 노란 조끼 여인은 인상적이다. 폭염이라 가만히 있어도 짜증 나는 판에 행동도 굼뜨고 말도 잘 못 알아듣는 노인들과 말동무를 해주고 짐을 들어주고, 실어주고, 부축해 주며 웃음을 잃지 않고 있는 여인이 철인처럼 보였다. 폭염 속에 우뚝 서있는 노란 조끼 여인! 철의 여인!

인상적인 노란 조끼 여인을 만나고 행복도우미에 대해서 검색을 해본 결과 전남 해남군이 어르신, 교통약자의 농어촌 버스 이용을 도울 목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농어촌버스 행복도우미' 역점추진사업이었다.

승강장 도우미 1명은 해남 터미널을 비롯해 장날 읍면의 주요 승강장에 순환근무를 하게 되며, 승하차 도우미는 1일 4~5회 버스에 탑승해 어르신 등 교통약자의 버스 이용을 도와준다. 특히 이용객이 많은 읍면 장날 오전에는 해당 버스 승강장에서 승하차를 돕고, 오후에는 버스에 탑승해 짐 들어주기, 버스비 결제 등 편의를 돕는다고 한다.

행복도우미에게 주어진 임무 외에 내가 만난 노란 조끼 여인은 허물없는 말벗이 되어 어르신들에게 삶의 활력까지 불어넣고 있었다. 노란 조끼 여인과 몇 마디 나눠본 나조차도 그녀를 만나기 위해 장날에 나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부터 온다. 노란 조끼 여인이 월급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처럼 여겼다면 뙤약볕 아래 노인네들의 신소리가 짜증으로 치받아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거나 싫은 내색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란 조끼 여인은 내가 버스정류장에 머물렀던 시간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직업상, 웃는 얼굴을 해야 하는 경우라도 폭염 속에서 노인들 상대로 장시간 지속은 힘들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어르신들을 대할 수 있는 힘은 노란 조끼 여인의 마음에서 나왔다고 본다. 폭염에 아스팔트가 녹아내리고 온열환자가 속출하는 여름의 어느 날, 노란 조끼 여인이 시끄럽게 소리친다.

나야, 나! 행복 도우미!

어르신들은 왁자지껄 노란 조끼 여인과 수다삼매경이다. 어르신들의 얼굴에 행복이 퍼진다.

다음 버스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노란 조끼 여인



사람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 우리 모두에게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모르거나 발휘하지 않고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신에게 그 능력이 있는지 실험해 볼 의향이 있는가? 있기를 바란다.

언제 어느 곳에 있든 행복 도우미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그런 세상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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