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조르바가 어렸을 때 버찌에 미쳐있었던 시절 이야기이다. 먹고 싶은데 돈은 없고 밤이나 낮이나 버찌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아버지 주머니에서 은화 한 닢을 훔쳐 버찌 한 소쿠리를 사서는 도랑에 숨어서 넘어올 때까지 처넣기 시작한다. 배가 아프고 구역질 나고 결국 몽땅 토하고 만다. 그날 이후 조르바는 버찌를 먹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한 적이 없다. 조르바는 그것을 ‘구원’이라 했다. 담배와 술도 똑같은 짓으로 언제건 자신이 원할 때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정열의 지배 같은 건 받지 않음을 강조했다. “고향 역시 너무 그리워서 죽을 것 같았지만 그것도 역시 목구멍에 처넣고 토해” 버린 사람, 조르바.
구원의 길을 떠나거나 혹은 길 위에 있는 수도자, 명상가, 철학자, 사상가, 종교가 등이 수두룩한 세상이다. 그것은 또한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는 말과 다름 아니다. 그들을 떠올리면 동시에 고난이라는 단어가 따라붙는 것처럼 그동안 보아왔던 ‘구원’이 이루어지는 형태는 ‘고난’의 모습이거나 신적인 존재로 인한 구원이었다. 그러나 조르바가 보여주는 ‘구원’이란 지금 이 순간,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구원을 받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신에게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버찌를 토할 때까지 입에 처넣는 것으로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조르바야말로 진정한 사상가이며 철학자가 아니겠는가.
반면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인 ‘나’는 전형적인 지식인이다. 가장 친한 친구가 터키의 지배를 받는 조국의 동포들을 위해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던진 말 “잘 가게, 이 책벌레야”라는 말을 상기하면서 조국을 위해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과 내적 갈등에 휩싸인다. 그런 와중에도 단테의 문고판을 자신도 모르게 들여다보고 있는, 책 속에서 세상을 읽어내는 인간인 것이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조르바는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고 즉흥적이며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조국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구원의 방식은 조르바식대로 이루어졌다. 조르바는 전쟁에 참여하고 비정규 전투원이 되어 산 생활을 했었던 터라 몸은 흉터와 총알이 지나간 자국, 칼자국이 전신을 덮고 있었다. 그 당시 불가리아 비정규군 신부의 목을 따고 귀를 잘랐던 일이 있었는데, 행상으로 변장하고 그 마을에 다시 들어갔을 때 자신이 목을 딴 신부의 아이들이 맨발로 구걸을 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조르바는 아이들을 불러 자신의 지갑 안에 있던 돈을 쏟아주고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준다. 조국을 위해 사람 목을 따고 마을에 불도 지르고 강도짓에 강간에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짓을 했던 자가, 그 이후 어떤 사람을 보든 불쌍한 마음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사람으로 변한 것이다. 여자를 밝히는 듯 보였던 그의 행동들조차 사실은 인간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한 애정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구원을 받은 겁니다”
“조국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겁니까?”
“그래요. 내 조국이지요. 내 조국으로부터 구원받고, 신부들로부터 구원받고, 돈으로부터 구원받은 겁니다. 나는 짐을 덜어 내기 시작했어요. 가지는 대로 덜어 버리는 거죠. 그런 식으로 내 짐을 덜어 낸 겁니다. 이런 걸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해탈하는 방법을 찾은 셈입니다. 나는 인간이 되는 겁니다.”
조르바가 말한 ‘인간’은 바로 ‘자유’와 동의어이다. 이것이 바로 조르바식 구원의 두 번째 방식이다. 조르바는 자신을 항상 자유인 상태로 유지한다. 그 자유의 다른 양태로 ‘춤’을 들 수 있는데 조르바는 언어보다 춤으로 자신의 감정을 더 잘 표현한다. 아들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춤으로 슬픔을 표현한 조르바, 말이 통하지 않는 러시아 친구와 춤으로 마음을 전했던 조르바. 책을 끼고 사는 먹물인 ‘나’에게 당신이 춤을 출 줄 안다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던 조르바.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영혼의 소리를 춤으로 바꿀 줄 아는 예술가이자 자유인인 조르바. ‘나‘는 결국 조르바에게 춤을 배운다. 그 행위는 조르바의 자유를 배우는 과정이면서 조르바의 구원에 한 발 다가서는 몸짓인 것이다. “자신이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을 조르바는 싸우고 죽이고 입 맞추면서 살과 피로 고스란히 살아 낸 것”이며 세상의 수행자들이 결국에 이르고자 하는 해탈의 경지에 이른 것임을 인정하는 순간이다. 활자로 된 세상에서 익혔던 지식과 고독이 남루해지는 지점이며 조르바식 구원방식에 감동하게 된다.
조르바식 구원방식 첫 번째 단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지금 당장 실천 할 수 있다.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목구멍이 터지도록 처넣는 것, 조르바가 버찌를 토할 때까지 처넣은 것처럼, 고향을, 아들을, 여자, 조국을...
당신은 무엇을 목구멍에 처넣을 것인가? 주인공인 ‘나’는 ‘버찌’ 대신 ‘책’을 택해 목구멍이 터지도록 집어넣고 다시는 생각이 나지 않을 때까지 읽기로 한다. 조르바와 같이 했던 그였지만 두 번째 단계인 ‘자유’에서는 자유롭지 못한 먹물의 한계를 드러낸다. 모든 사람이 조르바처럼 살 수 없기에 조르바의 자유에 다가가기 어렵다. 모든 것을 내려놓기가 그리 쉬운 일인가. 그래서 조르바가 그리운 것이다.
자, 조르바식 구원방식을 지금부터 시작해 보자. 첫 번째 단계, 토할 만큼 처넣기. 말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도록 처넣기. 그것도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조르바 따라 하기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해 볼 만하지 않을까. 두 번째 단계에서 머뭇거리고 있으면 조르바가 나타나서 춤을 청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