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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토스적 로맨티시즘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개선문>을 읽고

by 몽상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작품 <개선문>은 전 세계 독자들이 열광했던 책이다. 반면 냉철한 비평가들에게는 통속적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 책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선문>은 영화화되었고, 또 다른 레마르크의 장편들이 영화화되었다는 것은 그의 대중적인 지지도를 알게 해 준다고 볼 수 있다. <개선문>은 그의 대표작이자 아직까지도 읽히고 있는 고전에 속한다. 앞으로의 논지는 <개선문>에 전체적으로 흐르고 있는 낭만주의와 주인공(주앙 마두는 분석의 시각이 다양함으로 짧은 글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으로 제외하고), 특히 라비크의 로맨티시스트의 면모를 중점으로 말하고자 한다. 이전에 그러한 평가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개선문>을 읽은 나의 느낌은 로맨티시즘, 그 이상은 아니었다.


독일에서의 낭만주의는 18세기말부터 19세기 중엽에 걸쳐 일어났다. 그러므로 레마르크가 <개선문>을 발표했던 1946년과 <개선문>의 배경인 1938년과 1939년은 낭만주의는 이미 물러간 지 오래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전운이 감돌던 시대였다. 레마르크가 독일인이지만 그가 망명한 여러 나라들의 문화사조 역시 이미 낭만주의는 지나간 지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작품에서 극대화된 로맨티시즘을 보았다.


우선 작품 전체에 푹 절여져 있는 술 냄새에서 낭만주의의 단초를 보게 된다. 열거된 술의 종류만을 본다면 코냑과 보드카가 대부분이지만 그 술의 이름들은 다양하다. 뒤본네, 칼바도스, 듀리에지, 카시스, 키르쉬, 아페리티프, 휘스, 보브레, 로제, 에네시, 말텔, 포모스, 생자노, 페르노, 피스, 아니스, 프이유, 그중에서 가장 상징적인 술은 칼바도스와 페르노이다. 칼바도스는 주인공인 라비크가 비극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는 주앙마두와 처음 만나는 날 마신 술이면서 둘이 만나는 공간에 항상 존재하는 술이다. 페르노는 라비크가 주앙마두와의 사랑으로 힘들어할 때 고독의 시간 속에서 마신 술인데 이 술은 압셍트의 대용품격인 술이다(압생트의 대용품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칼바도스는 노르망디에서 나는 사과로 만든 술로써 라비크와 주앙마두가 같이하는 공간과 각자의 다른 공간에서도 서로를 떠올리며 마시게 되는 술이다. 작품 전편에 술이 없는 장면은 하나도 없다. 인물과 인물이 겹쳐지는 부분은 물론, 혼자 있는 시간에도 술은 항상 있게 된다. 특히 칼바도스는 이 작품에서 제3의 주인공이라 할 만큼 전체에 포진해 있다. 칼바도스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공포나 두려움보다는 낭만적 감정을 보여줄 수 있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시대의 암울함을 등에 업은 귀족적 취향으로서의 사랑을, 절대적인 낭만으로 치달을 수 없는 사회, 역사적 맥락으로서 인물의 허무를 보여준다.

주인공 라비크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탈출하여 파리에 밀입국한 뛰어난 실력을 갖춘 40대 외과의로, 파리의 무능한 의사들의 불법적인 수술을 도와주고 수수료를 받아 생활을 한다(망명자라는 것만 빼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는). 혼혈여성인 주앙마두는 애인을 따라 파리에 왔다가 애인이 급작스레 죽는 바람에 거리를 헤매다 우연히 만나 친절을 베풀어 준 라비크와 연인이 된다. 주인공인 두 인물은 안정되지 않은 방랑자에 속하는 사람들로 특히 라비크는 시니컬한 것처럼 보이나 그가 보이는 행동들은 로맨티스트의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문화적으로 유럽권에서는 식사시간 외에도 여가 시간에 도수가 약한 술을 마시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개선문>에 나오는 다양한 술의 종류와 여흥과 여행과 돈에 대한 무감각은 부르주아 근성을 버리지 못한 지식인의 고급한 취향으로 보인다. 역시 문화적인 다른 면모겠으나 만나는 모든 종업원들에게 팁을 주거나(그들이 원하지 않는 경우에도) 자신에게 아무런 서비스를 하지 않은 사람에게조차도 돈을 내미는 행동, 자신에게 달라붙는 모든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모습들은 전운이 감도는 시대에 마음 붙일 곳 없는 지식인의 행태라고 보기에 다분히 낭만적이다. 그 당시에 퍼진 유럽적인 병에 라비크가 걸려있던 것 일 수도 있다.


<개선문>에는 이러한 병에 걸린 인물들을 대변하는 시대에 대한 표현들이 눈에 띈다. ‘통조림 시대’, 멸망해 가는 시대‘,’ 냉혹한 시대‘,’ 강철시대‘ 등으로 표현된 냉소가 잔인하다. 그러나 그런 끔찍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내면을 보여주기 위해 작가가 택한 열거의 방식들이 반작용을 낳게 된다. 즉 비극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 인물들이 비극적으로 보여야 할 때, 작품에 많은 부분들이 열거에 의한 심리적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 대부분 주변 환경과 사물이나 자연 풍광을 통한 열거에 집착하는 바람에, 인물의 심적 고통에 가닿지 못하고 감상과 환상의 중간 단계로 변환되어 비극이 비극으로 전환되지 못하게 되는 아쉬움과 함께 이 역시 주인공 라비크의 로맨티스트로서의 기질을 숨기려야 숨길 수 없게 된다.

이상하게 라비크의 언행들을 따라가면서 우리나라 시인 이상화의 낭만주의 영향을 받은 초기작 ‘나의 침실로’가 떠올랐다. 낭만사조가 범람하는 감정의 물결이 진한 “나의 침실로‘의 주인공이 라비크와 겹쳐졌고 거기에 조앙마주도 같이 겹쳐졌다.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

내 몸에 피란 피 - 가슴의 샘이 말라 버린 듯 마음과 몸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 - 내 침실이 부활(復活)의 동굴(洞窟)임을 네야 알련만….

결국 조앙마두는 자신의 낭만적 욕망을 추구하다 애인이 쏜 권총에 맞아 죽게 되고 라비크는 스스로 프랑스 수용소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싣는다. 격정적인 사랑도, 종말의 시대도 모두 로맨티즘으로 마무리된 <개선문>의 마지막 장면에 칼바도스는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맨티스트의 전범을 보여준 라비크는 술잔을 손에 들고 있지 않았고 칼바도스도 없는 수용소로 향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작품 속에서 보여준 로멘티스트의 마지막 실재적인 행동이면서 시작일 수 있다는 암시로 해석을 해도 가능할까? 끌려가지 않고 제 발로 찾아든 그는 마돈나에게 도착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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