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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뭉클

소크라테스를 만나는 주유소

댄 밀맨『평화로운 전사』를 읽고

by 몽상가



새벽, 오아시스처럼 빛나는 주유소에 가면 소크라테스를 만날 수 있다. 밝고 번화한 거리는 사라지고 전혀 다른 세계를 완고히 내부에 간직한 주유소. 밤공기에 휩싸인 주유소를 기웃거리며 소크라테스를 찾는 나. 픽션과 논픽션 사이에서 혼돈을 겪고 있는 최근 나의 모습이다. 『평화로운 전사』를 읽은 후의 후유증이랄까.


“캄캄한 밤중의 문 닫은 음식점과 가게, 극장 등 거뭇거뭇한 형체 틈에서 주유소는 밝게 빛나는 형광 빛 오아시스 같았다.”


작가 자신이 슬럼프를 겪었던 대학시절, 인생의 멘토인 소크라테스를 처음 만나던 날의 주유소 풍경이다. 나에게는 작가의 삶을 변화시킨 ‘전사’가 되는 방법이나 훈련과정보다 소크라테스라 명명되는 노인을 만나는 ‘주유소’라는 장소가 강한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인적이 끊긴 새벽, 주유소라는 공간이 정신적 공간으로 이미지화되어 주인공의 극복기나 훈련과정의 고단함을 소거해 버린다. 그 결과 논픽션적인 면을 깔고 픽션이 조합되는 이야기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문학 작품을 대하는 독자는 픽션과 논픽션을 구분하는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이 생긴다. 나처럼 새벽에 주유소를 기웃거리는 이상 증세를 보이면서‧‧‧‧‧‧.


이 책은 오래전에 선물 받은 책이었는데 나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지 못하고 뒤로 밀려 최근에야 보게 된 책이다. 무엇보다 ‘전사’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전사’가 아닌 다른 번역이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은 있다. 아무튼 필요에 의해서 다시 찾아보게 되었고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과 2006년에는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영화를 찾아보고 나서 그에 따른 이미지까지 합쳐져 주인공인 댄 밀맨이 만났다는 백발노인을 주유소에서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감을 품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세계적인 체조선수가 되기 위해 훈련하던 댄 밀맨이라는 청년이 불면의 밤을 뚫고 일어나 주유소에서 96살의 노인을 만나게 된다. 그의 철학적인 언행에 자신도 모르게 ‘소크라테스’라고 부르게 되면서 그들의 훈련이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평화로운 전사’가 되는 방법이다.


“세상의 소란스러움에서 자유로워질 거야. 문제가 생길 때면 생각에서 벗어나 자네 마음을 바로 보게!”

인식의 도약을 설파하는 주유소 노인, 육체 내부 연금술에 관련된 몸의 비밀을 명상과 훈련으로 일깨워주는 소크라테스, 동양적인 사유와 훈련법으로 인해 더욱 친밀함을 느낄 수 있는 인식의 과정들, 결국 남는 것은 현재라는 순간임을 일깨워준다. 소크라테스가 반복하여 강조하는 말이 곧 ‘행복한 전사’의 길이었다. 전사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며 자신이 하는 일 속에서 사랑을 찾는다고 한다. 굳이 전사가 아니어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실천하기 힘들다는 아이러니가 우리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기에 행동하는 자만이 전사가 되는 것이다. 시작도 끝도 없이 실천하는 자가 바로 전사라는 말이다. 여타의 사색과 명상을 통한 참된 삶에 대한 지침서 격인 책들에서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규칙 면에서는 독특한 시각을 보이고 있어서 차별화되는 지점이 있다.


소크라테스가(여기서의 소크라테스는 고대 철학자인 소크라테스가 아닌 주인공이 주유소에서 만난 노인에게 붙여준 별명) 말해준 삶의 세 가지 규칙에는 역설, 유머, 변화가 있다.


역설, 인생은 수수께끼이니 그걸 알아내려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유머, 유머감각을 유지하라. 특히 자신에 대해서. 그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강하다.

변화, 같은 자리에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삶의 세 가지 규칙에 따라 산다면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자신의 감정을 건설적인 행동으로 바꾸지 못한다.


“감정이란, 오늘의 날씨처럼 자연스러운 거라네. 때로는 두려움이고, 때로는 슬픔이나 분노지, 감정이 문제가 아냐. 감정의 에너지를 건설적인 행동으로 바꾸는 게 문제의 핵심이야.”


아! 어느 주유소에 가야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 소크라테스를 만날 수 있을까? 작가의 대답을 들어보자.

이 책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자주 묻는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이 소설은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소크라테스는 실제 인물인가? 책 속에 묘사된 일들을 정말로 해낸 건가?”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절대적으로 실재하지만 댄 밀맨은 꾸며 낸 인물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어쩌면 지금쯤 소크라테스도, 댄 밀맨도 궁극적으론 아무 상관이 없음을, 우리는 단지 상징이고 푯말에 불과함을 여러분도 이해하리라. 정말 중요한 것은 자비, 친절, 스스로를 덜 심각하게 여기기, 그리고 순간순간 지나가는 찰나마다 삶의 은총에 깨어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비어있음의 미진함을 가진 나 같은 얼뜨기 독자는 세상과 동떨어진 오아시스를 찾아 헤맨다. 새벽 3시, 차에 시동을 걸고 형광 빛 오아시스로 향한다. 거리는 적요하다. 소크라테스의 음성이 들린다.


어디 있나?

언제지?

무엇을?


내가 대답할 차례다. 여기, 지금, 이 순간을.

나는 여전히 소크라테스를 만나는 주유소를 꿈꾼다, 전사는 실천하고, 바보는 반복한다고 했던가.

바보인 나는 소크라테스를 만나는 주유소를 어정거린다. 나의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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