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커튼』을 읽고
-
『커튼』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유명한 밀란 쿤데라의 에세이집이다. 그는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예술작품의 위치를 정할 수 있는 두 가지 기본적인 콘텍스트를 제시한다. 그 나라의 역사를 작은 콘텍스트라고 명명하고 그 예술의 초국가적인 역사를 커다란 콘텍스트라 칭하며 그에 따른 작품들을 통해 소설의 정신을 외치고 있다. 물론 자신이 인정하는 ‘사적인 소설사’에서 근대소설의 선구자들로 여기는 소설가들(라블레, 헨리 필딩, 로렌스 스턴, 곰브로비치, 헤르만 브로흐, 무질, 카프카,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통해서 말이다.
“같은 나라 사람들에 의해서 항상 폄하된 라블레는 러시아인 바흐친에 의해 가장 잘 이해되었으며, 도스토예프스키는 프랑스인 지드에 의해서, 입센은 아일랜드인 버나드 쇼에 의해서, 제임스 조이스는 오스트리아인 헤르만 브로흐에 의해서 가장 잘 이해되었다. 위대한 북아메리카인들인 헤밍웨이, 포크너, 더스 패서스 세대의 보편적인 중요성은 제일 먼저 프랑스 작가들에 의해 드러났다.(포크너는 1946년 자기 나라에서 부딪치는 몰이해를 한탄하며 ”프랑스에서 나는 문학적 움직임의 아버지다 “라고 썼다.) 지드는 러시아어를 몰랐으며, 버나드 쇼는 노르웨이어를 몰랐고, 사르트르는 더스 패서스의 텍스트를 읽지 않았다. 비톨트 곰브로비치와 다닐로 키스의 책들이 단지 폴란드어와 세르보크로아티아어를 아는 사람들의 판단에만 의존한다면 그 급진적인 미학적 새로움은 결코 발견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술의 초국가적인 역사는 커다란 콘텍스트로 작품을 받아들인다. 또한 어떤 소설을 판단하기 위해서 원래 쓰인 언어를 몰라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계 문학의 커다란 콘텍스트를 파악함으로써 소설의 미학적 가치가 드러난다. 그 미학적 가치란 소설이 해명할 수 있었던 실존의 알려지지 않았던 양상들이며, 그것이 발견해 낸 형식의 새로움이다. 미학적 가치를 발견하는 방식에 있어서 밀란 쿤데라적인 이론을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뜻있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실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밀란 쿤데라는 나에게 우상과도 같은 존재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느낀 전율과 제목에서 풍기는 아우라는 아직까지 그를 뛰어넘는 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경외의 대상인 작가의 에세이집을 통해 그가 추구하는 소설의 정신과 소설의 도덕에 대한 일침에 뜨끔해지는 순간,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풀지 못한 과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미학적 가치에 입각하여 거론된 작가와 작품들 속에서 유난히 나를 부끄럽게 만든 작품이 있었다.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그 이야기를 위해서는 그야말로 잃어버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고등학교 일 학년 때의 일이다.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들은 대부분 국어 선생님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만난 국어선생님은 검정 뿔테안경에 지적인 용모와 언어를 구사했으며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 어느 날, 선생님이 안대를 하고 교실에 나타났다. 학생들이 부부싸움 한 거 아니냐, 눈병이 났느냐 등 여러 가지 궁금증을 퍼부어대는 바람에 수업은 시작될 줄 몰랐고 수업을 진행하고자 한 선생님은 우리에게 안대를 한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너무 좋은 책이 있어서 밤을 새우고 읽었더니 눈이 충혈되었다.”
뭔가 색다른 것을 원하던 학생들은 선생님의 답변에 김이 빠졌고 수업은 시작되었다. 나는 수업 내내 선생님이 읽었다는 그 책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결국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에 찾아가 그 책 제목을 알려달라고 했다. 선생님은 아직 너희들이 보기엔 어려운 책이라고 하면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고 말해주셨다. 나는 그날로 그 책을 구입했고 밤을 새우면서 읽었다. 그다음 날 굉장한 피로함과 함께 그 책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고 재미도 없었다. 단지 존경하는 선생님이 눈에 핏발이 서도록 읽었던 책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글자를 읽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 책은 책장에서 누렇게 빛을 바래갔고 나는 어른이 되었다. 어른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읽었다고 생각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완역본이 11권이라는 사실. 그전까지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고등학생 때 읽었던 한 권이 전부인 줄 알고 있었다. 스스로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내 삶에서 풀어야 할 과제 중의 하나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권을 독파하리라는 찬란한 꿈을 꾸었다. 그 후, 수십 년도 넘게 세월이 흘렀다. 나는 아직까지 과제를 과제로만 남겨놓고 풀지 못하고 있다.
밀란 쿤데라가 이야기하는 거대한 콘텍스트 속에서 내가 선택하고 과제로 남겨놓았던 작품에 대한 전언을 들으며 삶에 뿌리내린 미학 개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인간의 삶에 다른 방식의 질문을 던지며, 개인의 정체성을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는” 문학을 통해 내가 경험했던 일련의 사건들과 현재진행 중인 인식 역시 밀란 쿤데라가 미학 개념을 존재의 개념으로 이해했을 때와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과제를 해냈을 때 미학적 가치는 배가 될 것이겠지만 말이다.
“오래전부터 나는 젊은 시절은 서정적 시기라고 생각해 왔다. 다시 말해서 한 개인이 거의 전적으로 자기 자신한테 집중하고 있어서 주변 세계를 보지도, 이해하지도, 명료하게 판단하지도 못하는 시기라고 말이다. 이러한 가설을 근거로 보자면, 미성숙에서 성숙으로의 이행은 서정적 태도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미성숙에서 성숙으로의 이행은 단지 젊은 시절에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삶의 결이 두꺼워지는 동안에도 미성숙에서 성숙으로의 이행이 불가피할 것이며 동시에 삶에 뿌리내린 미학 개념이 작동할 것이다.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삶은 불가분의 관계이므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미학개념에 충실하다는 말도 된다. 단, 미학적 가치를 발견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것에 대해서는 밀란 쿤데라의 조언을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해명할 수 없는 실존의 양상들을 문학 작품을 통해 받아들일 때 미학적 가치가 생겨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