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하원을 위해 아이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초인종을 누르기 전 옷매무새를 확인하려고 어린이집 앞 거울을 보는데 웬걸. 쌈닭이 하나 서 있다. 치열했던 일터에서의 전쟁 덕분이지. 부르르 얼른 얼굴을 흔들어 댄 다음 부드러운 엄마미소를 장착한다.
작고도 고운 아이의 손을 꼭 잡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따라 말은 얼마나 예쁘게 하는지, 또 표정은 어찌나 귀여운지 연신 사진을 찍어대며 순간의 행복을 저장하느라 바쁘다. 한참을 아이랑 놀다 보니 어느덧 밖이 어두워졌다.
오늘따라 유독 늦는 남편에게 카톡을 보내려고 휴대폰을 내려다본 순간이었다.
드르르륵. 엄마의 메시지다.
“성연아, 놀라지 마라. 엄마 지금 아빠랑 오빠한테 가고 있어. 오빠가 위독하단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눈이 재빠르게 텍스트를 반복해 읽어나간다. 그 어디에서도 스팸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엄마가 오타를 잘 쓰는데 혹시 그런 건가? 그러기엔 문맥이 너무 딱 맞는데.
위독이란 단어에 다시 눈이 멈춘다.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이제 막 말문이 트인 아이의 종알거리던 목소리가 아득히 멀어진다.
나는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지금 기차야. 성연아. 성연아. 성연아. 내려서 연락할게.”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엄마의 목소리. 그것은 완전한 공포였고 두려움이었다. 이 시간에 일해야 할 엄마, 아빠가 기차를 타고 포항에 있는 오빠에게 가고 있는 게 정말 사실이구나. 재빨리 코레일 앱을 켜 포항으로 가는 기차 시간표를 검색했다. 막차까지 남은 시간 앞으로 1시간.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다행히 서울역은 집에서 가까웠다. 당장 준비해서 나가면 충분히 탈 수 있을 것 같다.
남편에게 전화해 지금 당장 택시 타고 집에 오라고 했다. 왜냐고 묻지 않는 남편이 이상하다 생각하지도 못했다.
눈앞의 아이에게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지만 입술 끝이 경직됨을 느낀다. 난 뭘 준비해야 하지. 혹시 큰일을 치를지 모르니까 검은 옷을 입고 가야 하나. 아니 이게 무슨 불경스러운 생각이야. 미쳤구나 너. 그런 일은 절대 없어. 미리 상상하지 마. 지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그때였다.
‘띵동’
남편이 도착하기엔 아직 이른 시간인데 누구지?
인터폰을 올려다보니 나의 절친 부부가 문밖에 서 있다. 두 손에 얼굴만큼 큰 대봉감 두 개를 올린 채로. 우리 아이가 좋아해서 시골에서 직접 딴 대봉감을 들고 올라오는 길이란다. 고마워야 하는데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나의 창백한 얼굴을 읽은 친구는 서둘러 돌아가 주었다.
곧이어 도착한 남편에게 짧게 상황을 설명한 후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나서는 내 뒤통수에 대고 한마디 던진다.
“정신 똑바로 차려”
그래. 정신 똑바로 차리자.
일단 포항까지 가는 거야. 그리고 병원에 도착해. 나머지는 그다음에 생각해.
서울역으로 가는 택시 안.
고개를 숙여 내 손을 바라본다. 아까 아이가 잡았던 그 손이다.
수십 년 전 오빠의 고사리손을 어루만지며 엄마도 하루의 고단함을 풀었을까.
가슴이 저려온다. 어떻게든 빨리 가야 한다. 나의 엄마에게.
나중에 들으니 엄마는 내가 퇴근 전에 소식을 들으면 운전하다가 혹시 사고라도 날까 싶어 일부러 아이를 하원한 시간에 맞춰 문자를 보냈었다고 한다. 한 아이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절망의 순간에서도 다른 아이의 안위가 걱정되어 연락을 미룬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