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덕후와 삽니다
“어마마마 아침 문안인사드리옵니다”
또 시작이군.
우리 집은 매일 아침 6시 왕이 행차하신다.
<왕의 하루>란 책에서 왕이 매일 아침 대비마마에게 찾아가 문안인사를 드렸다는 걸 알게 된 후 시작된 첫째 아이의 모닝 루틴. 다행히 ‘어진 정치를 하라’는 답변까지 미리 정해줘 어미가 소올리스좌처럼 대답해도 순순히 물러가 준다.
슬쩍 눈을 떠 동태를 살펴보니 아이는 몸을 돌려 살짝 눈을 내리깔고는 근엄한 표정으로 거실로 나아간다. 그러고는 익숙한 듯 보자기를 꺼내 입는다.
보자기, 그것은 그의 시그니처다.
내 눈에는 재활용센터에서도 고개를 절레절레할 것 같은 누더기 천 일뿐이지만 그에게는 번쩍이는 금박으로 휘감겨 있는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곤룡포다. 아, 참고로 이번 시즌 그의 보자기 컬렉션은 금색, 청색, 붉은색, 흰색 등 다양한 컬러가 준비되어 있고 여기에 각 색의 광택 유무, 크기까지 나뉘어 총 30여 종의 천 쪼가리, 아닌 보자기가 준비되어 있다.
패션의 완성은 액세서리라 했던가. 남편의 실밥 터진 넥타이는 옥대로, 검은색 겨울용 아동장화는 화(靴)로 야무지게 디피되어 있다.
그러다 이제는 정말 제대로 된 의상을 갖추고 싶었는지 얼마 전에는 애지중지 아껴둔 명절 용돈을 내밀며 이 돈으로 곤룡포를 살 수 있는지 알아봐 달란다. 100만 원을 받고 싶어서 유 퀴즈에 나가고 싶다는 아이라 곤룡포를 갖고 싶은 마음이 오죽 간절했을까 싶어 바로 다음날 광장시장을 데려갔다. 그런데 어찌나 테이스트가 명확한지 본인이 원하는 색상의 곤룡포가 없다며 베테랑 상인분들의 현란한 입담에도 절대 넘어가지 않는 녀석. 그러다 우연히 지나친 어느 한복점 구석에서 푸른빛의 곤룡포를 매의 눈으로 발견해 내고는 비로소 굳은 얼굴을 풀었다.
그날 이후, 아이의 곤룡포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
경복궁 옆에 있는 국립 고궁박물관에는 조선 왕들의 어진이 전시되어 있어 자주 가는데, 아이는 그 앞에 한참을 서서 왕의 수염 모양이나 표정, 곤룡포의 주름 위치 같은 것을 살피곤 한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서 그날 인상 깊었던 모습들을 따라 그려보기도 하고, 영화 <올빼미>의 유해진 님 뺨치는 신들린 왕 연기를 선보이기도 한다.
덕분에 아이 작품을 디테일하게 칭찬하는 스킬이 나날이 발전 중이다. 비록 왕마다 입은 곤룡포의 색상이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더운 여름에는 왜 반팔 곤룡포가 없는지 등과 같은 질문에는 바로 대답해 줄 수 없는 역알못 엄마지만.
역사에 대한 지식의 정도가 아닌, 역사를 가까이하고 좋아하는 이들에게 붙여주는 별명이 역사덕후 라면 이 아이는 분명 역사덕후가 맞다.
영화 <명량>, <한산>, <노량>을 제작한 김한민 감독의 인터뷰를 읽다 보면 그 또한 이순신 장군의 덕후임이 여실히 드러나는데, 특히 영화를 제작하다가 힘들 때 난중일기를 읽으며 위로를 받았다는 그에게서 어쩜 내 아이도 커서 역사적 인물에게서 위로를 찾을 수 있겠구나 하는 예상을 해본다.
이제 막 두 돌이 된 우리 둘째.
어제부터 형 따라 보자기를 두르기 시작했다. 휴 너도 시작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