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세상을 말해보자면] 11장
내 주변에는 이것저것 잘 해내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이 하는 일 외에도 하고 싶은 일이 투성이라, 이것저것 하다 보니 그냥 모든 일들에 특별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하나 못하지도 않는, 여러 분야에 중간 이상으로 잘 해내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대부분의 것들을 잘 해낸다는 것은 좋은 말로 들린다. 예를 들면 공부도, 아르바이트도, 대인관계도 그저 원만하게 해내어 가끔씩 조그마한 트러블이나 시련이 오는 것을 빼고는 그저 평탄하게 흘러간다는 말이다. 사실 이런 이들의 문제는, 결국 그 '잘 해내는 것들'을 그저 별 큰 문제없이 쥐고선 '멍하니 있기 쉽다'는 점, 그리고 그 쥔 것들 중에 '놓아버릴 것이 무엇일지 결정하는 일이 너무나도 힘들다'는 점이다.
내가 그랬었다. 한 5년 전쯤이었나. 학부 4학년이 된 시점에서 나는 그저 내가 해오고 있었던 것들 중에 어떤 것이 나와 가장 잘 어울릴지를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를 들어, 내 기준에서는 특별히 잘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못하지도 않았던 A라는 것이 있었다. 나와는 달리 A에 시련을 겪고 있는 내 주변의 타인들을 보아하니, 위로해주기 딱 좋은 위치에 있었고, 이에 나는 시련을 겪지 않는 A에 대한 나의 무난한 경험을 전달하기 딱 좋은 사람이었고, 그리고 그런 나 자신을 보니 '나는 그래도 A를 잘 해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다. 이런 A라는 것이 종류나 유형과 상관없이 나에게는 너무 많이 산재했었고, 특별함 없이 둥둥 떠 다니는 평범한 것들에 "모-두" 호기심을 가지면서도, "모-두" 관심을 가지면서도, "모-두" 그럭저럭 해내고 있는, "두루두루 인간"이었다는 말이다.
당시 내가 가장 두려웠던 질문은 이런 느낌의 질문이었다.
“그래서 전공 취업 준비는 잘하고 있어?”
“무슨 일을 하고 싶어?”
"넌 어떤 사람이야?"
“뭘 좋아해?”
그때의 나는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좋아했는가. 특별한 애정도, 그렇다고 특별한 비범함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두루두루 인간'이었던 나에게는 '선택'이라는 말이 가장 어렵고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다 결국, 나는 나 자신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고 - 부족함 없이 잘 살고 있다고 믿었던 나였기에 살피지 '않'았다는 편이 더 나으려나 - 내가 준거집단이라고 느꼈던 그들, 그들의 시선만을 살피고 집중하다 제 옷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첫 커리어를 시작했다.
2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는 그 시절, 그저 정장 한 벌 입고 멋진 커리어를 시작한다면 뭐 좀 괜찮지 않은가 싶어서, 그저 사진이 박힌 사원증 하나로 설레발치며 SNS에 떳떳이 내보이는 일이 좀 멋있지 않은가 싶어서, 그저 술자리에서 내 명함 하나 내밀며 그 명함에 눈을 고정하는 지인 하나의 시선이면 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저 어디 가서 내가 다니는 회사의 이름이 마치 내 이름이 된 것 마냥 뿌듯하지 않은가 싶어서, 그저 내가 고작 그런 걸로도 충분한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아 그러다 알았지. 이건 아니구나."
그저 몇 가지만을 잘 해내는 사람이 오히려 부러웠던 날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 '몇 가지'라는 가짓수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원동력이 있었다. ‘다른 것들은 아니어도 적어도 이것들은 내가 잘 해내는 것들이라는 마음’에서 오는 원동력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 나는 그저 어떤 것들, 어떤 몇 가지를 챙기고, 그 밖의 나머지의 것들을 놓아버려야 할지 결론짓는 일이 굉장히 힘들었는데 말이지.
시간이 어언 흘렀다. 이 흐른 시간 속에서 나는 어쩌다 모든 것을 챙기는 일을 챙기지 않게 되었는가. 내가 지금 이 글을 써 내려가는 동안 무엇을 챙기지 않고 있다면, 왜 그 무엇을 챙기지 않고 있는가.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나는 왜 지금 그것들을 포기했는가 혹은 뒤로 미루고자 하는가.
무언가를 계속하겠노라 마음먹는 일, 다시 말해 지속적으로 챙기겠다는 마음은, 분명 2가지 때문일 것이다. 하나는 시작, 둘은 성공이다. 더 상세히 말하자면, 저 '하나'는 '시작'이라는 행동을 해내는 것, 그리고 저 '둘'은 각자가 생각하는 작은 성과이자 감정에서 오는 '성공'의 반복이다. 둘 중에서도 중요한 것을 찾자면, 시작보다는 성공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내가 계속하겠노라는 원동력은 아마도 성과와 감정에서 오는 성공일 것이다.
다음의 '이런 것들'은 챙겨 놓고도 '지속적으로는 챙기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흥미롭고 관심 있지만 막상 시작할 자신은 없는 것
- 시작하겠다는 마음만 가지고서 시작하지 않는 것
- 시작은 해놓고 계속하지 않는 것
- 시작도 했고, 계속도 하지만, 그에 대한 원동력이 부족한 것
- 시작이고 계속이고 나발이고 생각 없이 사는 것
- 등등
많은 것들을 놓쳤다 한들, 적지만 건진 일은 꼭 있을 것이다. 내가 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일, 나와 같은 결을 가진 이들을 편안히 곁에 두는 일, 그리고 당신을 셀 수 없이 사랑하고 있는 일. 모든 것들을 챙기지 못했지만 강렬한 손가락 몇 개를 꼭 꼽은 채로, 그저 이번 해는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1분기의 끝, 2분기의 시작이다. #글스타그램 #회고의밤 #lookback (20210403, 내가 쓴 글)
그렇기에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챙기고 있는 많은 것들에 관해 시작과 성공을 말할 수 있는가. 그저 시작만 해두고 작은 성공들을 이루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무엇을 놓아버릴지를 결정하는 데 있어 그저 '시작'에만 뚜렷한 초점을 두고 '성공'에 흐릿한 초점을 두지는 않았는가. 별다른 성과도 없으면서 꾸역꾸역 욕심부리면서 챙겨야 할 이유만 잔뜩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돈 잘 번다는 내 친구의 친구 이야기를 들으며 괜히 그 이야기를 쫓고 있지는 않은가. 그저 내 밥그릇도 아님에도 '시작'을 논하고 그 시작을 '작은 시작'이라며 합리화하고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누군가의 작은 인정과 누군가의 작은 말들과 누군가의 작은 동행을 원동력으로 삼지 않고, - 심지어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작은 성공들을 무시한 채 - 시작만을 외치고 있지는 않은가. 마치 주식을 사두고, 마치 비트코인을 사두고, 아무런 감정과 성과 없이 보이지 않는 실행력을 외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럴 바에는 난, 지금 와서야 챙기지 못한 것들을 가만히 내버려 둔 채로, 지금 챙겨둔 것들에 집중을 하겠다.
그럴 바에는 난, 지금의 내 손에 꼽힌 열 손가락의 것들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놓치지 않겠다.
그럴 바에는 난, 지금 챙겨놓은 것들을 왜 챙기고 있는지 고민해 더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놓겠다.
그렇게, 나는 챙기지 못한 것을 두고 꼭 챙긴 것에 집중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해내겠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사는 세상을 말해보자면] 11장 끝.
이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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