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 39분],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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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시작이다. 내 동생은 집에서 먹는 집밥에 늘 토를 단다. 맛이 없다는 투정으로 밥상머리를 채운다. 오래간만에 어머니께서 실력 발휘를 하셨다며 찜닭을 내오셨는데, 감칠맛이 어떻다는 둥, 간이 어떻다는 둥, 고기에서 냄새가 난다는 둥,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마치 쫌생이 같다. 그냥 좋게 넘어가면 될 일을 굳이 밥 먹는 순간까지도 티를 내야겠냐고. 나는 뭐 맛있기만 하고만.
"아니 그냥 그렇다고 말하는 거야. 안 먹겠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러니까 다음에는 다르게 해달라고 그냥 말하는 것뿐이야. 그냥 그런 거야.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여?"
도대체가 동생이 툭 던져버린 이런 말에 어떤 알맹이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졸업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내 동생은 아직 가족끼리 함께 사는 법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밖에서 살던 습관이 남아 모든 것들이 귀찮고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다. 요즘 들어 하루에도 세 번 네 번씩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동생을 보면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어머니는 이런 동생을 보며 얼마나 피가 거꾸로 쏟을지 '안 봐도 비디오'다. 그렇다고 중재를 한답시고 말을 얹으면 중간에 왜 끼냐며 한 소리를 들을 것이 뻔하므로, 나 편하자고 그저 저녁밥을 꾸역꾸역 입으로 넣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간다. 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듣기 불편한 말을 그동안은 그래도 좀 잠잠하나 싶었으나 결국 오늘에서야 듣게 되었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마음을 쿡쿡 쑤시지만, 이러다 밤 10시 즈음 드라마가 할 시간이면 그 마음 잠시 놓아두고 드라마에 감정을 이입하고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을 어머니를 잘 알기에 그냥 두어보기로 한다. 그냥 넘어가자, 넘어가자.
남자들이 샤워를 하다 보면 거울 앞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누군가가 왜 인지 생각해보라 한다면, 자기애에 가장 충실해지는 시간이라고 이유를 들 것이다. 샤워실 거울 앞에만 서면 왜 이렇게 피부가 좋은지, 머리는 예쁜지, 키는 적당한지, 군살은 없는지, 신기할 노릇이다. 우리 아파트는 꽤나 오래된 탓에, 화장실에 욕조가 따로 없다. 이전에 살았던 곳은, 한 10년 전 일이 다 되어가지만 아무튼, 그곳은 욕조가 있었고 거품 목욕이라는 취미를 남들 하는 그 허세라는 이름으로 자주 했었다. 지금 사는 곳에서 그 취미를 하지 못한다 한들, 별 불만은 없다. 그저 요즘은 물줄기를 맞는 이 시간에 별 생각이 다 지나가니 딱 좋다.
쏟아지는 물줄기와 함께 밝은 조명의 샤워실 거울 앞에 우두커니 서서는 결국 나도 여느 남자 사람들과 같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 그 여자가 또다시 내 머릿속을 스친다. 아까는 내가 꽤나 별로였나 싶기도 하고, 무엇이 별로였는지 회상하기도 한다. 어디 가서 순하게 생겼다고 야무지게 생겼다고 착하게 생겼다고 그런 말이나 들어봤지, 뒤따라오는 남자가 험상궂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상상이 드는 그 정도로 불쾌한 얼굴은 아니지 않나? 하는 마음으로 샤워를 하고 있다. 뭐 아무렴 어떤가, 난 다시는 그 여자를 마주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
"무슨 사우나 왔어? 샤워를 뭔 웬 종일 하고 있어. 물세 네가 다 낼 거야?"
아직 어머니의 노여움이 남아있나 보다.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이 상책이다. 이 끝나지 않은 휴전에 괜히 참전했다가는 뼈도 못 추리고 나자빠질게 뻔하다. 이게 다 그 여자 때문이다. 그 여자만 떠올리지 않았다면 샤워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이렇다 저렇다 하며 온갖 생각을 품지는 않았을 테다. 샤워기 물이라도 꺼 놓고 그런 사색을 했으면 어머니께 할 말이라도 있을 터인데.. 하긴 그렇지만, 이 따뜻한 물줄기가 빠진 사색이라니, 아예 없느니만 못한 일일 수도 있겠다.
그러다 다행히도 드라마가 할 시간이 된다. 특별한 일이 없을 때면, 왠지 모르게 시간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오징어 한 마리를 구워 가위와 함께 소파로 몸을 들이미는 어머니는 ‘오징어 좀 잘라보든가.’ 하는 툭 던진 한 마디로 늘 그랬듯이 어머니는 이 상황을 퉁 치려고 한다. 조금 전 그저 샤워를 조금 오래 한 것을 꼬투리 잡아 나에게 싫은 소리를 한 것이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다. 말도 안 되는 로맨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마감 뉴스를 하겠다며 음식으로 가득한 CF 광고들이 넘쳐난다.
“아 벌써 출근하기 싫다. 아 벌써 퇴근하고 싶다.”
이렇게 내뱉은 말에 어머니는 평소와 다르게 당신도 내일 출근을 하기 싫다며 함께 하소연했다. 원래 같으면 ‘싫어도 해야지 어떻게 하겠어’ 하면서 어머니 특유의 위로를, 물론 나는 정말 이해되지 않지만, 그런 위로를 던졌을 텐데. 아침 알람을 맞추면 마치 하루의 마침표를 찍듯 그렇게 오늘 밤도 마무리하는 거다.
‘여기는 어디지. 뭐지. 왜 어둡지. 어디야 여긴.’
발 끝을 내려다보니 발아래가 단단하긴 한 것 같은데, 형체 없이 둥둥 떠있는 느낌이 드는 것을 보니 둘 중 하나인 듯하다. 하나는 그저 드라마를 보다가 픽 쓰러져 죽어버렸거나, 다른 하나는 이곳은 내가 인지할 수준의 꿈, 다시 말해 자각몽이거나. 여느 꿈속과 같이 두 팔을 위아래로 흔들어 마치 새가 된 듯 휘저으면 현실과는 다르게 자유롭게 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지금 이곳은 여지없이 꿈속이다. 어두컴컴한 곳에 있노라니 날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내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위로 솟아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형국이다.
글쎄 나는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러다 멀리 빛이 보인다.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상한 소리도 함께 들리는 듯하다. 내 좋은 눈과 좋은 귀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유심히 집중한다. 분명히 빠른 속도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슬슬 겁이 나기 시작한다. 무섭다. 빛이 오는 반대 방향으로 뒷걸음질을 치다, 결국은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직감적으로 나를 쫓아와, 나를 집어삼키거나 그저 짓밟아 버릴 것만 같다. 무섭다.
"지금 들어오는 열차는 소요산, 소요산행 열차입니다."
귀로 흘러 들어온 음성은 지하철 안내방송, 그리고 내가 지쳐 쓰러질 때쯤 내 옆으로 점점 느려지는 그 빛나는 물체의 속도, 그리고 정확히 내 앞에 투명한 창문이 멈춰 서고, 문이 열린다. 마치 지옥 열차를 타라는 무언의 암시 같기에 나는 또다시 발을 뒷걸음질 쳤다. 열차는 날기라도 하는 듯 뒷걸음치는 걸음걸이만큼 바싹 붙어 발끝에 열린 문이 닿아 있기를 반복한다. 그저 한 발자국만 내딛어도 그 문에 들어가게 된 것 마냥 문이 닫혀버릴 것 같은 공포심이 든다. 이곳은 어차피 꿈일 뿐이라며, 뭐 어때 라는 마음으로 열차에 탑승한다. 탑승하는 일이라면 그저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출근하는 열차일 뿐이었는데, 왜 이리도 무섭고 두려운 느낌이 드는 것일까.
그리고 고요한 소요산행 열차 안. 어느 누구도 없다. "누구 없어요?" 하는 나의 말은 그저 나만이 느낄 뿐,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의 심오한 고요함이다. 그리고 저 멀리, 다음 칸이 보인다. 그다음 칸에 앉아 있는 단발머리 여자가 보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는 그녀는 서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듯하다. 조금씩 조금씩 고개를 돌릴수록 마치 내 눈 앞으로 그녀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듯하다. 얼굴이 뭉개져 누군지는 알 수 없다. 점점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점점. 점점. 더 점점.
"아이씨, 이게 무슨 꿈이지?"
온몸이 땀으로 뒤덮였다. 시끄러운 알람 소리가 나보다 한발 늦었다. 아침이다. 어제는 그래도 알람 소리를 좀 덜 시끄러운 것으로 바꾸고 잤구나. 땀으로 축축한 침대에서 눈을 떴지만, 마치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채 벗어나길 거부하고 있다. 찝찝하고 축축한 이곳이 차라리 오늘의 출근길보다 더 나은 기분이다. 오늘 소요산행 출근 열차에는 몸을 싣기 두렵다. 8시 39분에 그녀가 또 나타날 것 같다. 꿈속의 그녀가 왠지 어제의 그 여자일 것 같다. 아니 분명히 그 여자가 맞다. 그냥 왠지. 그래 그냥 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