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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호 Oct 01. 2021

있다 없으니까 그저 괜한 외로움을 타는 일

[아침 8시 39분], 7장

<7>


  벌써 퇴근 시간이다. 오늘은 유난히 아침부터 바빴다. 늦잠을 잔 탓에 아침 댓바람부터 놓친 것이 없는지 집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어다녔었는데, 출근하고 나서도 이렇게 손발부터 뇟속까지 활발하게 운동을 하게 될 줄이야, 오늘은 참 바쁜 날이었다.

  덕분에 시간은 잘 갔다. 오전에 그 남자와의 그 강렬했던 일이 단 한순간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머릿속을 일로 꽉꽉 채웠다. 이거 좋아야 하는 거지? 6시 9분 타임 전철을 타기 위해, 매일 같이 걷는 이 익숙한 길을 걸으면서, 오늘도 그 남자와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혼자 그려봤다. 


  '왜 아침에 그 전철을 타지 않았냐고, 

   왜 그렇게 서서 나를 쳐다봤냐고,

   아직도 그 흰 스니커즈를 좋아하냐고.'


  이런 이야기를 꺼내놓아야 할지, 이 중 일부만을 꺼내놓아야 할지, 아니면 평소처럼 그 아찔한 모른 척을 이어가야 할지 고민한다. 모르겠다, 그냥 이따 가서 마음 가는 대로 하지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전철역을 들어오니, 괜히 그 남자를 찾게 된다. 오전에 지각을 했나, 그래서 오늘 야근을 하나, 혼자 생각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는 일이 민망하기도 하다. 그 사람은 나를 모르는 눈치였는데, 그렇다면 그냥 지금 이 많은 생각들을 그저 지나쳐도 될 일을 말이다. 그렇기에 지금부터는, 오늘 저녁을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기로 한다. 어제 야식으로 먹은 떡볶이가 괜히 내 양심을 찌른다. 오늘마저도 고기반찬을 원하는 내 혓바닥을, 입맛을 돋우는 용도가 아닌, 입천장과 치아 사이로 '쯧쯧' 때리는 용도로 쓰는 중이다. 이 한심한 돼지야. 그만 좀 먹어라.


  그렇지 않아도, 요즘 위장병에 걸린 듯하다. 어제 먹은 떡볶이 덕분인지, 오늘 오전에 화장실을 몇 번이나 다녀온 지 모르겠다. 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데, 마치 내 자연의 섭리를 그 사이에 끼워 넣는 일이, 어쩌면 그것은 회사에서 대변을 보면서도 월급을 받는다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나 짜증 났던 것은 처음이었다.

  꽤나 여러 번 다녀왔는지, 사수 조교님이 나에게 괜찮은지 어디 아픈 것은 아닌지 물었고, 나는 떡볶이 이야기를 섞으며 배가 살살 아프다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서랍장에서 도쿄에 놀러 갔다가 사 왔다는 '카베진' 뭐시기 하는 약을 두 알 주었다. 물과 함께 먹으면 좀 편안할 것이라면서.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했나? 그 일본 약을 먹고선 정말 감쪽 같이 괜찮았고, 덕분에 야근을 면했다.

  그래서 저녁에는 간단히 샐러드를 해서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 전에 괜찮은 드레싱을 하나 샀는데, 쏙 내 맘에 들었다. 상큼하면서도, 달달한 것이 샐러드를 고급 음식점에서 먹는 기분이랄까, 입에 침이 돈다. 집에 양배추와 양파가 있는데, 어떤 채소를 더 사서 들어가야 하지, 생각하는 찰나에, 전철이 들어온다.


  '오늘 퇴근길에는 그 남자가 없다. 오늘 퇴근길에는 왜 인지 외로웠다.'


  그가 없는 빈 퇴근길을 걸으며, 나는 그 남자의 생각을 놓지 않았다. 괜히 오늘은 그 남자를 생각해줘야 할 것만 같았다. 확신은 아니지만 왜 인지, 아침에는 그 남자가 나를 기다려준 것 같은데, 저녁에 나는 그 남자를 기다려주지 못했다. 고작 샐러드를 먹겠다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 남자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매번 업무단지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면, 그저 번듯한 일반 사무를 보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일이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 남자가 나에게 하늘 같은 선배였던 시절, 그저 묵묵하게 저 할 일을 해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특히 말을 아끼면서도 가끔 뱉는 말들이 매력 있는 사람이었기에, 서비스업을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다. 산수 강산도 바뀐다는, 5년도 더 된 일이니, 그 사람도 좀 바뀌었으려나.


  "여보세요. 어, 나 조금 아까 퇴근했지. 왜?"

  가장 친한 동기의 전화다. 이 친구는 졸업하자마자, 우리 학교 근처에 있는 금융 공기업에 들어갔다. 나는 썩 그렇게 이 친구가 똑똑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는데, 졸업하기도 전에 합격 소식을 나에게 가장 먼저 전했던 친구다. 멋있다고 생각했다. '혼자 열심히도 살았구나', 싶었다. 이 친구는 출근이 8시까지여서, 한 번도 같이 출근길을 밟은 적이 없었다. 같은 전철역에서 내리는데, 같이 출근하면 심심하지 않고 좋을 텐데.

  퇴근했냐는 질문을 하고서는, '전 대리'인가 뭔가 하는, 매일 같이 나에게 싫다며 욕 하는 그 상사 때문에 야근을 했다며 몹시 화를 낸다. 같이 일 하는 사람은 퇴근하다가 잡혀서 돌아왔다면서. 진짜 너무하지 않냐면서. 나 같으면 노동청에 신고했다면서. 하지도 못할 거면서 허세 부리기는..

  그러더니 갑자기 요즘 만나는 남자가 있냐며 묻는다. 그리곤 밥을 먹었냐며 묻는다. 너무 어울리지도 않는, 맥락도 없는 이 질문들의 집합에 하나하나 대답을 해주다가, 나는 그저 본론을 꺼내놓으라며 말을 잘랐다. '너희 집 앞에 솔로몬 치킨 인가 뭔가, 거기서 치맥 어때?'라는 질문에, 고민도 하지 않고 알겠다고 했다. 불쌍한 샐러드 재료들아, 내일 아침에 만나자, 하며 냉장고 신선 칸에 넣어뒀다.


  날씨가 좋다. 산책하기가 딱 좋은 그런 날씨다. 선선하면서도 싸늘하지 않고, 산뜻하면서도 건조하지는 않다. 친구가 전철을 타고 온다고 했으니, 전철역을 가서 마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아침이 된 것 같다. 출근길을 다시 걷고 있는 느낌이다. 전철역 앞 버스정류장에 유난히 낮은 벤치가 있다. 그 벤치에 앉아서 노래를 몇 곡 스트리밍 하다 보면 밀린 인스타그램을 훑다 보면 금방 오겠지, 싶었다. 버스가 다 여섯 대쯤 지나갔을 때, "야", 하며 나를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친구의 옆에 그 남자가 있었다. 정확히는 퇴근을 같이 하고 있었다. 놀랐다. 분명히 놀랐지만 놀란 티는 내지 않았다. 그 흰색 스니커즈를 신고 있는 것을 보니, 분명히 맞다. 뭐지? 왜 같이 있는 거지? 둘이 아는 사이였나, 생각하면서, 왜 이렇게 내가 궁금해하는지, 그저 '쿨'한 사람이고 싶었다. 그런데 사실 쿨할 필요도 없는 건데, 왜 쿨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나 자신을 다시 다그쳤다.


  "아 우리 팀 주임님이야, 인사해. 여기 근처 사신다고 해서 퇴근 시간 맞아서 같이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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