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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제가 합니다.

3

by 지하

온기가 없는 사람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집에 있다가 쓰러지신 거라 얼굴에 상처 하나 없었다. 조금 차가웠을 뿐 이전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유독 눈꺼풀이 무거워 보였다. 눈을 영영 뜨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사람들이 아빠를 천으로 꽁꽁 싸맸다. 다 식은 몸이 몇 번 뒤집혔고 둘러싸고 있던 천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발끝부터 얼굴까지 몇 바퀴를 칭칭 감았다. 나도 모르게 저러면 숨이 안 쉬어질 텐데, 했다.


엄마는 세 번 연달아 기절했다. 오열하는 고모와 동생, 기절하는 엄마를 앞에 두고 나는 입 안쪽 살을 깨물어가며 표정을 유지했다.


아빠의 친구들은 그런 나를 보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기특해했다. 자기 자식이 내 절반만 했어도 걱정이 안 될 거라고도 했다. 보통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 자식 속이 가장 곪아있을 텐데.

입 안에서 피맛이 나기 시작했다.


염 하는 절차가 있는 것은 고인의 마지막 갑갑함을 함께 경험하기 위해서인 걸까.

우리는, 나는 왜 여기 서서 온전히 그 과정을 지켜봐야 하는 걸까.


20대 후반은 참으로 모자란 나이였다. 분명 성인은 맞는데 남은 가족을 책임지고 이끌어갈 능력까진 없었다. 기댈 사람은 없어졌는데 혼자 감당하기엔 능력도 경험도 모자랐다. 근데 모자란 거지 못하는 건 또 아니라 징징댈 수도 없었다.


관에 마지막 메시지를 적으라고 했다. 이제 내가 책임질 테니 편히 쉬시라는 내용을 적었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최대치를 짜내 어른들이 바라는 장녀 연기를 해냈다.


할머니께는 염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않았다. 할머니가 쓰러지면 간호할 사람이 없었다.


*


경찰에서 집을 조사해야 한다고 찾아왔다. 형식적으로라도 현장조사는 꼭 필요하다고 했다. 엄마는 자기가 마지막 정리를 하러 가야겠다고 하더니 홀린 듯 옷을 갈아입었다. 고모와 동생이 대신하겠다며 뜯어말렸으나 엄마는 완고했다. 그 꼴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휴가 직후 장례식장으로 바로 온 터라 집안 상태를 몰랐다. 말릴 근거도 없었고 말릴 힘도 없었다. 엄마는 결국 고모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엄마가 나가자마자 친구를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마침 조문객도 별로 없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딱히 참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동생은 엄마 없을 때만 우는 게 어딨냐며 나보고 너무하다고 했다. 원망하는 투는 아니었고 그냥 너무하다고만 했다.


동생에게 잠시 역할을 맡겨두고 밖으로 나왔다. 입구 앞 연석에 걸터앉아 울기 시작했다.

나는 소리 내서 울 줄 모른다. 뭘 잘했다고 우냐고 몇 번 혼난 뒤로 어릴 때부터 숨을 참아가며 우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덕분에 내가 머리가 아플 만큼 울었다는 사실을 남들은 잘 모른다.


나를 따라 나온 친구는 침묵으로도 위로하는 방법을 아는 따뜻한 사람이다. 우리 둘은 그렇게 밖에 조용히 있다가 내 눈가에서 붉은 기가 가실 때 즈음 다시 장례식장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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