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복은 양복으로 받아놔. 반대하는 사람 있으면 내가 없애버릴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최대한 단호하게 과격한 표현을 내뱉고는 전화를 끊었다. 길게 끌 시간이 없었다. 동생 말고도 여기저기 걸어야 할 곳이 많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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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3일 차 아침, 아빠의 부고를 알리는 전화를 세 통 받았다. 모두 엄마한테서 온 것이었다. 세 통의 전화 내용은 모두 같았다. 아빠가 안방에 쓰러져있고,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
엄마는 나에게 전화를 걸었던 기억이 전혀 없다고 했다.
걱정을 해오던 쪽은 오히려 엄마였다. 엄마는 큰 병은 없었지만 자잘하게 자주 아팠고, 외로워했다. 아빠는 고혈압 외에는 먹는 약도 없었고, 최근에는 골프에 취미가 붙어 운동에도 열심히였다. 두 달에 한번 집에 오는 딸보다 약속이 먼저였다.
술담배를 하는 쪽은 아빠인데 건강검진 결과는 항상 아빠의 압승이었다. 엄마는 늘 억울해했다. 셋이서 가벼운 등산을 갔을 때 혼자 뒤처진 것도 엄마였다.
혹시나 하고 해 둔 통화녹음도, 동영상 저장도 전부 엄마 위주였다. 아빠와의 시간은 언제나 나중에, 였고 아빠 또한 마찬가지였다.
환갑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 재산 정리는커녕 사업을 막 시작하고 키워나가려던 때. 큰 딸은 중소기업에 간신히 취업해 서울 물가를 감당하기 바빴고, 막내딸은 대학원 졸업도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당신께서 짊어진 무게는 여전했고, 사업가라는 인생 2막이 화려하게 진행될 줄 아셨을 거다. 주변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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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5일 차에 본가에 방문하는 일정이었는데 그 이틀을 못 기다리셨다. 사실 딸이 오기로 한 그 이틀 뒤에도 골프 여행이 잡힌 상태였기에 어차피 마찬가지긴 했을 거다.
뒤로 잡힌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가장 빠른 KTX를 잡았다. 올라가는 동안 주변사람에게 부고소식을 전해야 했다. 동생과 회사,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 그 이후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전해야 할지 몰라 채팅창 상단에서부터 내려가며 최근 연락했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좌석엔 짐만 놓아두고 열차 출입문 근처에 붙어있는 보조좌석에 앉았다. 멍하니 창문을 보거나 울면서 전화를 했다. 다행히 입석승객은 없었고 내 사정을 눈치챈 것 같은 역무원이 종종 지나다닐 뿐이었다.
열차에서 내리는 나를 맞이해 준 건 이미 검은색 옷으로 다 갈아입은 고등학교 친구들이었다. 나를 장례식장까지 태워다 주고는 준비가 될 때까지 근처 카페에 모여있겠다고 했다. 친구들은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언제든지 부르기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정작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빠의 빈소는 내가 치러본 장례식 중 가장 작은 빈소였다. 응급환자로 이송된 곳에서 장례를 바로 치러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나름 대기업 요직에 있었던 아빠의 영향력으로 인해 조부모님 때는 대형병원의 가장 큰 빈소에서 장례식을 치렀었다. 해당 장례식장에서 가장 큰 빈소를 잡았지만 그럼에도 초라해 보임은 어쩔 수 없었다.
본격적으로 근조화환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빠의 거래처, 아빠의 인맥들로부터 온 것들이었다. 자리가 모자라 빽빽하게 들어선 와중에 가장 앞에 있는 것은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온 근조화환이었다. 우리 회사가 다른 건 느려도 근조화환만큼은 가장 빠르게 도착한다는 농담이 있었는데 정말이었다. 나보다도 일찍 도착해 있었으니 말이다.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 이때만큼 자랑스러웠던 적이 없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쭙잖은 언니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동생을 보자마자 눈물이 쏙 들어갔다. 상복을 빌릴 때 문제는 없었냐고 하니 장례식장 측에서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조금 난감해하긴 했지만 잠깐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고모부와 외삼촌의 반응은 간단명료했다. 요즘은 여자도 양복을 입는구나. 그 어떤 평가도 의문도 없는 말투였다. 내 과격한 다짐이 무색할 정도였다. 어찌나 감사한지.
양복으로 갈아입고 상주완장을 차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이 와중에 웃기는 소리지만 나는 바지 정장이 제법 잘 어울리는 편이다.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조문객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뭘 아는 사람이 없어 안 그래도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코로나라 장례식장 인력도 부족했다. 조문객 명단을 적을 곳도 없어 친구들에게 노트를 사다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잘 끝낼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