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상주를 하겠다는 생각은 충동적인 치기가 아닌 제법 오래된 다짐이었다.
외할머니 장례식 때의 일이다. 상주는 엄마의 막내 동생인 외삼촌이 맡았고 실질적인 상주 역할은 아빠가 했다. 둘이 상복을 입고 나란히 서 있으니 아빠와 삼촌이 꼭 형제처럼 보였다.
집안의 첫째 손주인 나는 대학생이었고 첫째 손자는 유치원생이었다. 장례식이 진행되었고, 손주들을 대표하여 첫째 손자가 불려 나갔다. 아이는 주변 눈치를 보며 잔뜩 보며 철푸덕 엎어졌고 그 자리에 있던 어르신들 모두가 기특해했다.
상주를 하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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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까지 입은 이유는 상주 완장을 차기 위함이었다. 이 집은 아들이 없어서 어쩌냐는 말을 아빠 장례식장에서까지 들을 수는 없었다.
울다가 실신하다를 반복하는 엄마를 두고 응급실 기록을 뗐다. 장례식장 직원을 만나 필요한 절차를 밟았고 이후 진행될 일정에 대해서 들었다. 코로나로 인해 인원을 추가로 동원하기는 힘들다고 했지만 이 부분은 걱정하지 않았다. 연락을 받자마자 근처에서 대기 중인 고등학교 친구들만 해도 열명이었다. 일손이 부족할 걱정은 없었다. 인간관계에도 퇴직금처럼 중간정산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했다.
어쩌면 아빠의 장례식엔 사람이 많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증조부모님 장례식 때 왔던 수많은 인원을 떠올리며 그보다 많지는 않겠지 싶었다. 정승이 죽으면 조문을 가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저녁 7시가 넘어가자 조문객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비록 집합금지가 풀린 상태긴 했으나 팬데믹 시국이었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조문객보다 인원이 많아 구석에 얌전히 있던 나의 친구들이 활약할 시간이었다.
아빠의 조문객은 증조부모님 때 왔었던 아빠 측 조문객들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사실 사람들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도착했고 영정사진 앞에서 멍하니 서서 한동안 절을 하지 못했다. 조문객들은 아빠와 저번주에, 그저께, 어제, 그날 아침까지도 연락했었다고 말했다. 그날 저녁, 내일, 다음 주, 다음 달에 약속이 잡혀있었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답변 없는 연락과 기약할 수 없게 된 약속 앞에서 모두들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아빠를 닮은 아빠의 친구들은 끊임없이 술을 마셨다. 술은 냉장고에 머물 새도 없이 미지근하게 나갔고 음식은 바닥이 났다. 조문객들의 상차림을 돕던 내 친구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지만 아빠 친구들은 음식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참치캔 하나에 소주를 두 병씩 까던 아빠처럼 말이다.
잔뜩 술에 취한 아빠 친구무리가 다시 분향소로 왔다. 술기운과 울음이 섞여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더니 향 대신 담배를 꽂았다.
나는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빠한테 담배를 끊으라고 매일같이 말했었다. 오늘은 입을 여는 대신 눈을 감았다. 들을 사람이 없는 말은 입밖에 잘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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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은 주머니가 깊어 각종 물건을 보관하기에 좋았다. 명함지갑, 조의금함 열쇠, 내 핸드폰, 아빠 핸드폰, 생리대, 진통제까지. 다 넣고도 공간이 남았고 겉으로 보기에 티 나지 않았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화를 돋우던 한복을 생각하면 양복은 정말로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양복은 최초의 목적까지도 문제없이 달성해주고 있었다. 나보다 스무 살은 족히 많은 고모부를 보고 내 남편이냐고 묻는 사람은 있었어도 상주가 누구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딸이 어쩌구로 시작하는 그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