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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귤 Aug 26. 2020

미니멀 라이프를 채워주는 것들

축축했던 여름 편


어디 가서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고 말하면,

가끔은 이런 말을 듣는다.


그럼 무슨 재미로 살아요?


소비라는 것은 이렇게 사람이 죽네 사네 할 정도로 큰 기쁨이다. 거의 매일 하는 소비가 나의 행복인 줄 알았던 날들은 냉장고에 코끼리 넣기처럼 옷장에 들어가지 않는 옷더미를 만들었고, 그것을 계기로 소비를 대신할 재미들을 찾아가고 있다.



그래서 내린 결론, 무슨 재미로 사냐고 묻거든 밖에서 누굴 만나 맛있는 걸 먹는 재미로 산다는 거다.

그런 미니멀리스트가 재미 찾기 힘든 요즘. 재미가 없다는 말이 철없어 보일 정도로 힘든 요즘.


장마로 축축했고 코로나로 슬프더라도,

그래도 여름을 가득 채워주는 것들이 있다.






숨만 쉬어도 행복한 연차데이에 동네 피크닉

엄마와 함께 좋아하는 음식을 잔뜩 챙겨 그간 가볼 생각도 안 했던 동네 공원에 갔는데 평화 그 자체.

모니터 앞에 앉아있을 시간에 우리 빼고 아무도 없는 초록 가득한 곳에 누워있으니 효과는 2배였다.

근데 공원에 화장실이 없어서 평화가 오래가진 못했다.



오후 여덟 시 퇴근길에 만난 하늘

구조물 사이로 핸드폰을 내밀어서라도 무조건 찍어야 하는 색의 하늘. 예전에 어른들이 '하늘 보며 살아야 한다'라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비 오는 날 카페 입구에 나란히 우산

난 사람들이 귀여울 때가 너무 좋다. 혹시나 해서 봤는데 딱히 안내문은 없었다. 그래서 더 귀여워 보였던 우산들.



체감상 지구 반대편까지 갔던 북토크

자주 SNS를 찾아보고 책을 출간할 때마다 주문해서 읽던 두 분의 북토크. 오프라인에서 만나볼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 했는데 운 좋게 당첨이 됐다. (로또는 안 돼도 이런 운은 있는 편)

신청서에 미리 질문을 받아 Q&A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내 질문도 대문짝만 하게 띄워졌다. 사실 생각했던 명쾌한 해답은 얻지 못했지만 마케터들 다 이러고 사는구나 위안 아닌 위안을 얻었던 시간.



얻어먹어도 당당한 망원동 고양이

파우치에 넣어 다니는 간식을 꺼내자 맡겨놓은 것처럼 꽤 뻔뻔하게 받아먹는다. 저 당당한 눈빛.. 한두 번 얻어먹은 솜씨가 아니다.

그래 넌 당당해도 되겠다 귀여우니까. 코는 왜 저렇게 말랑촉촉 연분홍인 걸까..



퇴근하고 흥분 상태로 만드는 돼지파스타

딱히 먹고 싶은 건 없지만 무조건 맛있는 걸 먹어야 하는 병에 걸린 지 오래다. 그럴 때마다 만드는 파스타.

정확히 2018년 2월부터 현재까지 일주일 평균 2회 이상 파스타를 먹고 있다. 새로 생긴 별명은 파스타돼지. 그리고 흥분한 이유는 그저 퇴근을 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싸준 스마일 도시락

너무 귀여워서 뚜껑을 열자마자 라이언킹에서 막 태어난 심바를 들고 의식을 치르는 개코원숭이마냥 밥그릇을 들고 돌아다녔다.

점심시간 시작으로 초흥분상태인 나를 자극시킨 도시락을 추억하기 위해 사진으로 남겼다.

근데 난 콩을 정말 싫어한다. 콩 중에서 강낭콩을 제일 싫어한다. 귀여움의 대가로 6개의 강낭콩을 거의 3분간 꼭꼭 씹어먹었다.



아빠의 첫 필름 카메라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집 모든 추억을 찍어준, 아빠피셜 그 당시 30만 원짜리 필름 카메라.

장식장 서랍에 약 15년 정도 묵혀있던 것을 발견해서 배터리와 필름을 주문했다. 설마 하고 넣었는데 위이잉 필름 감기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나의 새로운 취미를 담당해주고 있는 친구.. 아니고 어르신.



유월 중순에 심었던 해바라기

척박한 환경(사무실)에서도 쑥쑥 자라줬다. 부실한 멀대여도 내 눈에는 예뻐 보이는데 이게 바로 자식 둔 부모 마음?

씨앗이 생기면 초코 묻혀서 해바라기씨 초코볼을 먹기로 했다. 다음 약속을 해서 그런지 꽃이 점점 시들어도 많이 섭섭하진 않은 기분.



따로 찾지 않아도 항상 주위에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들이 내 행복인가 보다. 물건은 많이 없어도 엄마와 고양이들, 자연이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여름도 넘치게 채워질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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