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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귤 Jun 01. 2023

작고 보들보들한 사랑

길고양이 콩이와 나


 확실한 행복이 필요한 날이 있다. 얼굴에 선스틱을 바르고 털이 붙지 않는 나일론 바지를 입는다. 그러고는 엄마의 빨간 스쿠터를 타고 달린다. 그 시작은 여느 때처럼 익은 얼굴로 텃밭에서 돌아온 엄마가 식탁에서 툭 던진 말이었다.


“요즘 작고 삐싹 꼴은 고양이가 혼자 돌아다녀.”

 늘 가방 속에 길고양이 간식을 넣고 다니던 나는 큰 쥐만 하다는 그 새끼 고양이의 생김새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작고, 말랐고, 혼자라는 단어들이 관심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엄마는 고양이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대뜸 이름을 지어주자고 했다.


 “흠···. 그냥 ‘애기’라고 부르는 건 어때?”

 “별로야. 걔만의 이름이 필요하다구.”

 생김새도 성격도 모르는 존재의 이름이 쉽게 떠오를 리 없었다. 시시한 이름이 몇 번 오가고 결국은 엄마가 떠올린 ‘콩이’로 정해졌다. 뜻은 갖다 붙이기 전문인 내가 갖다 붙였다. 비록 지금은 삐싹 꼴았지만 콩처럼 동글동글 통통해지라고 콩이.


 지금까지 만난 길고양이들에게 멋대로 붙여준 이름이 수도 없지만, 바람을 담은 이름은 처음이었다. 궁금증은 더더욱 커졌다. 단 한 번도 자의로 텃밭에 따라나선 적 없던 나는 다음날 곧장 엄마의 스쿠터 뒤꽁무니에 매달려 밭으로 향했다. 앞에서 펄럭거리는 엄마의 바람막이 주머니에 두 손을 넣으며 이래서 함부로 이름 붙여주는 거 아니라고 하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꽃밭 근처에서 발견한 콩이는 정말로 작았다. 얼마나 작고 깡말랐는지 거센 바람이 불면 나동그라질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들고서야 무늬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 바탕에 마카롱만 한 검정콩 두 개와 조그만 치즈콩 세 개가 콕콕콕 박혀있는 삼색이. 옆구리는 움푹 들어가 있었다. 엄마가 윗집 개 까미를 위해 챙겨 다니는 고구마와 계란 노른자를 나눠주었더니 허겁지겁 게눈 감추듯 먹었다. 그날 이후 새끼 고양이용 습식 캔과 사료 포대를 구매한 나는 결국 꽃밭 한편에 집까지 놓아주게 되었다. 출입구 위에는 심혈을 기울여 최대한 예쁜 글씨로 ‘콩이네’라고 적었다. 나의 성실한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새롭고 즉흥적인 것을 좋아하는 나는 사랑을 할 때만큼은 성실하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텃밭에 출근 도장을 찍게 되었고 내 이부자리는 안 펴도 콩이 잠자리는 매번 매만져주었다. 저녁시간에는 그날 찍어온 사진과 영상을 보며 낄낄 웃었다. 충분히 웃음이 나올 법도 한 것이, 영상 속 엄마와 나는 생전 내본 적도 들은 적도 없던 말투로 콩이를 부르고 있었다. 고양이 울음소리는 마치 갓난아기가 우는 것 같아서 섬뜩하며 특히 부리부리한 눈이 무섭다던 엄마는 콩이가 고양이인 걸 잊은 것 같았다. 갈 때마다 눈에 띄게 자라는 콩이의 몸집만큼이나 우리의 행복도 점점 커져갔다.



 계절은 예고 없이 가고 또 찾아왔다. 해가 저물면 언제 따뜻했냐는 듯 온몸을 서늘하게 감싸는 공기에 우리는 하루에 한 번씩 꼭 콩이를 걱정했다. 갑작스레 닥친 한파에 고여있던 물이 얼어있는 것을 보거나 돌보던 길고양이가 떠났다는 남들의 소식을 접할 때는 겁이 났다. 가혹한 계절에 길고양이 학대 사건 뉴스는 끊이질 않고 자꾸만 들려왔다.


 길고양이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존재였다. 예고 없이 생활구역을 옮겨버릴지 모르고, 갑작스레 고된 임신과 출산을 겪게 될지 모르고, 목숨을 위협하는 질병에 걸리거나 짐승만도 못한 인간의 눈에 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걱정이란 꼭지를 잘라낸 거북알 같은 거다. 무심코 떠올린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고갈되기 전까지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게 만든다. 넓고 넓은 세상을 두고 엄마의 꽃밭에 찾아온 길고양이는 나에게 존재만으로 행복을 주는 존재가 되었고, 존재라는 것은 결국 유한하다. 즉 지금의 행복 또한 유한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세상 이치인 그 사실이 살에 칼날이 꽂히듯 새삼 깊숙이 와닿았다.


 유치원생 시절 키우던 거북이 이후로 가까운 죽음을 접한 적 없는 나는 자기 전 유튜브가 추천해준 시한부 고양이의 사연에 눈물을 질질 흘리다 베개를 푹 적시는 데 이르렀다. 힘든 길생활을 하다 잠깐이나마 가족들을 만나 따뜻한 곳에서 사랑받은 게 참 다행이었다.


 길동물의 삶은 치열하고 끝은 허무하다. 죽은 길동물을 구청에 신고하면 종량제 봉투에 담겨 쓰레기장에서 처리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젠가 콩이가 별이 되다면 우리는 꽃밭에 묻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때 가서 보내줄 방법을 논의하기엔 힘들 것 같아 미리 정한 것인데 눈물은 왜 맺히는지,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떠야 했다(결국 찔끔 흘렸다). 온 신경이 ‘존재의 소멸’에 가있었다. 이 행복의 끝에는 결코 피할 수 없고 감당할 수도 없을 것 같은 마지막 순간이 기다리고 있다. 존재가 주는 행복의 크기가 마지막에 닥쳐올 슬픔의 깊이와 비례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현실을 직시한 언니만 괴롭고 막상 콩이는 별생각 없어 보인다. 잘 먹고 잘 놀고 잘 싼다. 근처에 차가 지나가거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싶으면 잽싸게 컨테이너 구멍으로 몸을 숨길 만큼 겁 많은 콩이는 내 목소리만큼은 알아듣는다. ‘콩아악’하고 목청껏 부르면 왜 이제야 왔냐는 듯 먀옹거리면서 튀어나온다. 뭔가 원하는 게 있을 땐 째깐한 목소리로 어찌나 열심히 의사 표현을 하는지. 그 작디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적어도 콩이를 보고 있을 때만큼은 행복의 유한함 같은 건 생각나지 않는다. 작고 보들보들한 모양을 한 사랑만이 내 앞에 살아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성실한 사랑이 지금의 행복을 무한하게 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랑한다면, 미안함과 미련 없이 행복만으로 꽉 찬 순간이 만들어지겠지. 그 순간들은 여러 형태의 기록을 통해 꺼내볼 때마다 다시 행복으로 새겨질 거다.


 인생은 이름 따라간다더니 묘생도 마찬가지 인가보다. 안쓰럽던 새끼 고양이는 말 그대로 콩처럼 보기 좋게 동그래졌다. 중성화 수술도 받고 순탄히 성묘가 되어가는 중이다. 이름을 불러도 나타나지 않으면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만큼은 여전하지만.


 가만히 걱정하며 시간을 보내기엔 할 일이 많다. 깔아놓은 돗자리에 콩이가 왔다 갔다 하며 묻힌 흙을 걸레로 훔친다. 그릇들을 깨끗이 씻어 말린 뒤 다시 가득 채운다. 하얀 털이 묻어있는 쿠션도 팡팡 털어준다. 어디까지나 꽃밭 주인의 허락 하에 가능한 공존이기에 주변 환경미화도 철저히 한다. 그 사이사이 부는 바람에 키 작은 풀들이 흔들릴 때마다 고개가 절로 돌아간다. 그러다 보면 깊은 잠에서 깬 건지 조금 멀리 놀러 갔다 온 건지 모를 콩이가 찾아온다. 나는 반가워하며 은근히 곡선을 그리는 통통한 몸통을 연신 쓰다듬는다. 오늘도 성실하게 사랑했고 내일 역시 그럴 거다. 그러니 우리의 내일도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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