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쉐프로듀서 Sep 10. 2019

재료 본연의 맛이란 무엇인가

주먹밥으로 보는 쌀 이야기

요리만화 속 고수들의 비장의 무기

만화 원작 드라마 '오센'의 된장국을 만드는 장면

만화 식객의 주인공 성찬이 일본인들에게 진짜 한식을 먹여주겠다며 보여주는 요리는 간단했다.

잘 지은 밥과 간단한 국, 소박하기 그지없는 반찬.

일본인들은 이 소박한 밥상을 보고 처음엔 어이가 없어서 놀라지만, 맛을 본 뒤에는 그 맛에 놀란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의 요리만화인 오센의 유명한 에피소드 중 하나인 미소된장국 편을 보면

망가지고 볼품없는 콩을 밤새 하나하나 골라내며 정성스럽게 만들어낸 미소된장으로

아무런 조미료도 넣지 않고 최고의 미소된장국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요리만화에서 주인공들에게 비장의 무기는 절대 화려하거나 비싼 요리가 아니다.


우리에겐 없어서는 안 되며 굉장히 밀접한 존재, 

그렇기 때문에 점점 정성과 관심, 그리고 맛을 잃어가고 있는 밥과 된장국처럼

만화 주인공들의 요리에 대한 열정이나 관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음식들은 굉장히 단순한 음식들이다.


필자에게도 이러한 음식이 하나 있다.


여행의 주요 목적이 식도락인 필자이다 보니

여러 번 일본 여행을 다니면서 수많은 지인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일본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뭐야?'라는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을 들을 때마다 필자는 딱 한마디를 한다.


'주먹밥'


일본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분명 이런 생각을 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하여간 칼럼니스트 놈들은 입만 살아서 자기가 철학적인 줄 알고 저런 말을 한다니까'


그런데, 정말로 필자가 일본을 다니면서 먹은 음식 중 제일 맛있는 게 주먹밥이다.

절때 철학적인 의미나 있어 보이는 척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일본에 가면 주먹밥이 가장 맛있다.


히로시마의 상징물인 히로시마 원폭 돔

히로시마.

동일본보다는 서일본을 선호하여 규슈와 쥬코쿠를 주로 여행하는 필자에게는

이젠 여행 때마다 늘 들리는 친구 집 같은 곳이다.


많은 블로그와 유명 맛집 리뷰들은 히로시마에서 무조건 먹어야 하는 음식들로

히로시마식 오코노미야키와 구레 해군 카레 등을 추천한다.

그러나 필자는 히로시마에 올 때마다 꼭 들리는 가게가 하나 있다.


한국도 지역마다 유명한 지역 체인점이 있는 것처럼

히로시마에도 역이나 아케이드, 어딜 가든 보이는 유명한 명물 체인점이 하나 있다.

히로시마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무사시 무스비

히로시마를 걷다 보면 마치 닭갈비가 유명한 춘천에 어딜 가든 보이는 매운 순댓국처럼 굉장히 자주 보이는 간판이 하나 있다.


어딜 가나 보이고, 흔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이 쉽게 지나쳐 버리는 이곳은 바로

히로시마의 대표 주먹밥 체인, 무사시 무스비다.


여행 좀 해본 사람이거나 쥬코쿠 지역에서 거주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 한 번쯤은 들어봤다는 무사시 무스비.


사람들에게 주먹밥은 맛이나 식사로 먹기보다는 간단한 요기에 가까운 음식이지만

히로시마에 온다면 주먹밥은 하나의 요깃거리가 아닌 찾아가서 먹는 요리가 된다.

무사시 무스비의 대표 메뉴 긴무스비(은주먹밥)[좌]와 산사이 무스비(산채 주먹밥)[우]

주먹밥이 요리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있다면 필자는 당당히 YES라고 말할 것이다.

밥을 짓는 과정, 간을 맞추고 뭉치는 과정. 

그 과정만으로 요리로서 인정받을 충분한 가치가 있다.

(혹여나 3분 짜장 햇반 전자레인지 돌리는 과정이 있으니 요리라고 말하는 독자는 없기 바란다.)


어떠한 반찬이 있던. 밥이 맛이 없으면 당연히 밥맛이 떨어진다.

밥이 맛있으면 반찬 정도야 소소해도 행복하게 먹을 수 있는 식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쌀이 달라봐야 얼마다 다르다고, 필자는 고작 주먹밥 하나에 이리 열광하는 걸까?

왜 저 간단한 주먹밥 하나에 수가지 미사여구를 붙이면서 찬양하는 것일까?

그냥 일본에 취한 전형적인 친일파가 아닐까?


맛있는 밥이란 무엇인가

일본의 급식(좌)와 한국의 급식(우)

이전 칼럼에서 했던 말을 인용해볼까 한다.

"일본은 1960년대 쌀이 공급과잉이 되면서 점차 배불리 먹는 쌀보다 맛있는 쌀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의 쌀이 맛있는 것은 여행의 즐거움이나 친일파적인 생각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일본인의 쌀을 대하는 반듯하고 섬세한 자세 때문에 밥이 맛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쌀이 주는 소소한 맛의 기쁨을 잊어가고 있다.

밥은 그저 반찬을 먹기 위한 무언가가 되어버린 요즘 쌀의 맛을 느끼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필자도 그랬지만, 학교급식을 잘 먹지 않았던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왜 학생들은 급식을 잘 먹지 않는 것일까?

수많은 영양사들과 교사들은 맛있는 반찬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 급식 쌀은 맛이 없다.

단체급식의 필수품 증기 취반기

단체급식은 주로 증기 취반기를 이용한다.

요즘은 병영식과 단체급식도 가스식 밥솥을 이용해서 밥맛이 좀 나아졌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리지만


요즘도 수많은 단체급식에서는 증기 취반기를 이용한 일명 찐밥을 짓는다.


찐밥은 그야말로 쌀을 제일 맛없게 만드는 방법이다.

고슬고슬함이나 윤기는 상상도 할 수 없고

그냥 쌀을 통째로 떡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짓인가.


평생의 입맛을 좌우할 10~20대 시절을

이런 밥을 먹으며 학창 시절과 군생활을 보내니

한국인들의 밥에 대한 미각이 당연히 망가질 수밖에 없다.

또 그 밥에 대한 보관방법은 어떠한가.


대한민국 어딜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공깃밥, 꾹꾹 눌러 담아 전기 밥 통속에 보관하여

안 그래도 맛없는 찐밥을 더더욱 망쳐놓는다.


밥을 이렇게 대하는 모습은 일본에서는 정말 보기 힘들다.

일본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도자기 밥그릇

웬만한 대중음식점들은 반찬이나 국을 담아두는 경우는 있어도 밥을 담아두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그 수많은 인원이 먹는 급식이나 자위대원들의 병영식조차 스텐 식판이 아닌 밥그릇에 담아준다.


쌀의 품종이나 관리방법,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다


밥에 대한 관심 그 하나만으로 한국과 일본의 밥은 굉장한 맛 차이를 보인다.

스포츠에서의 한일전이라면 몰라도, 밥맛에서의 한일전은 한국의 완벽한 패배다.


아직도 일본의 밥맛이 좋다는 것은 그저 친일파적인 편견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라면

이제 그 잘못된 생각이 조금이나마 바뀌었으면 좋겠다.


바쁜 일상과 서구화된 식단, 강렬한 조미료의 반찬, 점점 줄어드는 쌀 소비량과 밥의 맛을 잊어가는 사람들.

우린 한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맛있는 밥이란 무엇인가?"


일본인에게 주먹밥이란

히로시마의 유명 음식 만화가 桐沢十三(키리사와쥬조)가 그린 무사시 무스비

다시 주먹밥 이야기로 돌아오자.

누구나 간단히 만들 수 있는 쉬운 요리인 주먹밥이

옛날부터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일본의 소울푸드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 카모메식당(좌)와 주먹밥을 만드는 장면(우)

영화 '카모메 식당'을 본 독자라면, 일본인에게 주먹밥이 어떠한 의미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헬싱키라는 머나먼 타국에서 사는 그녀들이 주먹밥을 만드는 장면은

멀리서도 일본이라는 나라는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듯 주먹밥은 일본인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대표 먹거리로서 그들의 일상 속 깊이 침투해있다.


주먹밥에 대한 일본인들의 사랑 때문일까?

일본인들은 바쁜 일상 속에서도 쉽게 먹을 수 있는 새로운 주먹밥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1974년 설립된 일본 세븐일레븐

1974년 일본 세븐일레븐이 처음 문을 열고 4년 뒤인 1978년.

일본 세븐일레븐은 세계 최초로 편의점용 주먹밥을 만들어내어 판매한다.

김이 밥에 수분 때문에 눅눅해지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지금은 명실상부 편의점의 대표 품목인 이 제품은

바로 그 유명한 '편의점 오니기리(삼각김밥)'이다.


하지만 편의점 오니기리 때문에, 일본인들은 진정한 주먹밥의 맛을 잊어가고 있다.

주먹밥이나 초밥의 밥은 어느 정도 식혀야 하는 게 맞지만, 아예 차게 식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체온 정도의 온도로 식히는 것이 중요한 맛의 포인트이다.

냉장 보관인 편의점의 특성상 차게 식어버린 편의점의 주먹밥은 전자레인지에 데워먹는다 하더라도

그 특유의 찰기와 온기를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주먹밥은 한국의 김밥과 위치가 비슷하다.

집에서 어머니나 할머니가 만드는 정성스러운 음식의 상징이며

밖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간편함과, 어딜 가든 가게가 있다는 점.


그리고 김밥처럼 점점 진정한 맛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에서도 말이다.

히로시마 최대 번화가 혼도리 정류장 골목에 위치한 무사시 무스비

몇몇 칼럼니스트들은 일본 최고의 주먹밥을 뽑으라 한다면 

굉장하게 유명하고 거창한 셰프의 맛집을 소개하지만

필자는 일본 최고의 오니기리는 단연 무사시 무스비라고 말하고 싶다.


편의점 주먹밥이 넘쳐나는 현대사회에서, 히로시마 사람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오며

히로시마 사람들의 주먹밥 맛을 지켜온 히로시마의 원동력, 그것이 바로 무사시 무스비의 매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히로시마에서 무사시 무스비는 그저 주먹밥집이 아닌, 

일본의 주먹밥을 이어나가는 중요한 가게가 아닐까.


독자 여러분도. 가끔은 여행지의 특산물이나 화려한 지역 명물 음식보다, 소박함의 행복을 느껴보는 게 어떨까


무사시 무스비(무사시 주먹밥)

むすびのむさし


4-15 Hondōri, Naka-ku, Hiroshima-shi, Hiroshima 730-0035 일본


-FIN-


글쓴이-쉐프로듀서

작가의 이전글 영국자동차와 영국음식의 동고동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