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종종 나에게 글을 써보라고 했다.
누군가는 출근하기 바쁠 금요일 오전 8시. 서둘러 작고 매끄러운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그날은 자신을 표현하는 키워드 100개를 써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한 날이었다. 지인 중 가장 부지런하고 책임감 있는 그녀는 흐트러지기 좋은 요일임에도 이제 막 씻고 나온 깨끗한 모습으로 화면 너머에 마주 앉아있었다. 그리고는 내 키워드에 대한 긴 이야기를 특유의 깊은 표정으로 들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마음을 글로 써보는 건 어때요?
영상에는 그 마음이 다 담기지 않는 것 같아요. 이 장르를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그리고 못난 마음들이 정작 못나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주연님만의 매력이에요. 이 키워드를 봐요. 인정욕, 성공, 욕심, 열등감... 그런데 이 단어들이 주연님이 이야기할 때는 못난 단어처럼 느껴지지 않아요.'
그녀는 어떤 시선으로 날 보고 있었던 걸까?
간혹 그녀가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전혀 몰랐던, 혹은 잊고 있던 나를 발견한다. 그녀가 날 마케터로 키워냈지만 방식은 달랐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녀의 방식을 따라갈 수 없었다. 화제가 되는 소재를 기존의 주제와 결합해 반응을 이끌어내는 나와 달리, 그녀는 화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끌어내 카메라에 담았다. 그녀의 눈은 빛을 담는 유리 같았다. 그 유리 안으로 어떤 것이 들어가든 유리를 통해 비친 것들은 깨끗하고 순수해졌다.
그녀처럼 '타인'이라는 불쾌감을 뚫고 들어가 깊이 자리한 결정을 찾아내기란 나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그녀가 간혹 그 유리에 나를 담아 보여주었다.
비친 모습은 생소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소녀가 처음으로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서서 낯선 이를 보듯 자신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순간과 같았다.
'내가 클래식을 그렇게 좋아했던가?'
서른이 넘은 아직까지도 이 질문을 한다. 으레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애(愛)보다는 증(憎)이 마음속에 강하게 섞여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르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