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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갖지 못한 사람

by Aurore오로르

한낮의 해를 담은 흰 커튼이 다리를 사락사락 스치는 듯한 느낌. 눈을 감고 있었지만 어렴풋이 점심시간이 지난 것을 알 수 있었다. 오전까지 전달해야 할 업무가 있었고 머릿속에서는 몇 번이나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짓궂은 몸은 이불속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개운하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길 바라는 마음과 다르게 몸 상태는 몽둥이로 이곳저곳을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한두 번 겪은 일은 아니다. 신경을 온통 곤두세워 지내던 서울을 벗어나 부모님 댁에서 자고 일어나면 언제나 같은 상황을 겪었으니, 아픈 만큼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16살이 될 때쯤 경북의 영천으로 갔고 19살에 대구에 자리 잡아 32살 가을에 상경했다. 상경하기 3년 전쯤엔가 경산으로 이사를 가기도 했지만 살던 곳에서 15분이 채 되지 않는 거리였고 훨씬 더 먼 영천까지 모두 내 머릿속에는 ‘대구’라는 한 지역으로 묶였다. 그렇다면 장장 15년 정도를 ‘대구’에 살았으니, 그곳에서의 기억이 좋든 싫든 간에, 적어도 내 뇌는 그곳을 일종의 고향의 일부로 여길 테다.


연말이 되면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부모님이 살고 계신 여수로 간다. 부모님이 계신 곳은 장범준이 여수 밤바다를 애달프게 외치는 이순신 광장에서는 차로 40분이 걸리며 사방이 논과 밭으로 둘러싸인, 아직까지도 밤이 되면 반딧불이가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는 그런 시골 마을이다. KTX를 타고 한참을 이동해 내렸을 때 이곳에서 드는 위화감을 지울 수 없다.


이곳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던 곳이다. 어릴 때 명절마다 몇 시간을 차를 타고 이동해 잠시 지냈던 곳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가게 앞에는 작은 1차선 도로가 있었고 도로 너머에는 조용히 황금빛을 띤 논과 밭이 드넓게 펼쳐져있었다. 근대 한국문학에서 아름다운 단어들로 묘사된 배경들은 바로 이런 곳 아니었을까.

이웃집은 청, 홍, 백색 띠가 어지럽게 돌아가는 회전등이 겨우 달려있는 이발소다. 누구의 감각인지 모를 다 뜯어진 분홍색 벽. 건너편에는 서양 문학에서 불길하다 여겨지는 검은 염소가 순순히 묶여있었다. (내 눈에는 귀엽게만 보였지만 아마도 늙은 어른들의 몸보신을 위한 희생제물 아니었을까. 아무리 서양에서 불길한 동물일지라도 몸보신을 위해서라면 아이 돌보듯 키워 잡아먹는 시골 노인들이 내게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할아버지 댁에는 작은 뒷마당도 있었다.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소와 닭, 돼지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혹시 불멸의 동물은 아닐까 생각했다.


남들은 명절이나 연말연초가 되면 고향을 찾아 나선다. 나는 부모님이 어느 날 갑자기 자리를 잡아버린 여수로 향할 수밖에 없다. 이곳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아무리 친척들과 즐겁게 보낸 곳이라고 해도 이곳은 나의 고향이 아니다. 주변엔 이 사실을 잊을만한 이렇다 할 카페, 영화관, 백화점조차 없으니 난 여기에 도착해서 떠날 때까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어릴 때조차 4~5년마다 거주지를 옮겼기 때문에 실상 나에게는 ‘고향’이랄 것이 없다. 그렇다면 나에게 ‘대구’는 고향일까? 일부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구’에서 문화적 이질감을 지워낼 수 없었던 나는 15년 내내 이방인으로 지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고향에 가서 위로받고 오던데, 그런 의미에서 나에겐 단단히 발 디딜 곳이 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 서울은 어떨까? 얼마 전 서촌에서 미팅이 있었다. 미팅 장소가 지인의 작업실 근처라 잠시 들렀는데 지인이 자고 있어 아내분이 맞아주셨다. 전날 30분 밖에 잠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겨우 잠든 잠에서 깰까 얼른 발을 돌려 나오는데 서울이 생활터전이 되었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고향이라는 건 이렇게 갑자기 친구를 찾아가는 일이 가능해지는 곳일까?


그러나 서울이 내게 고향과 같은 곳이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어릴 때는 부모님의 직업상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성인이 되어서도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며 아직 만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계속해서 궁금해하는 나는 쓰러져도 괜찮은 곳을 찾기보다 그저 파도 타는 것을 즐기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쓸쓸한 느낌이 가끔씩 고개를 든다고 할지라도 어떤 곳이 나에게 '고향'이 될지 궁금해하며 사는 삶은 썩 나쁘지 않다. 오히려 희망차고 즐겁기까지 하다. 어떤 삶이든 아쉬운 면이 없을 수 없다. 그러니 이런 삶도 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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