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이들에게 '그리움'을 주제로 한 일기를 내줬다.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 전에 먹었던 음식에 대한 그리움, 쾌변에 대한 그리움(?) 등 다양한 모습의 그리움이 나를 웃음 짓게 한다. 12살의 '그리움'이 우리의 '그리움'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그러다 문득 나의 그리움에 대한 호기심이 고개를 든다.
지금의 나에게 그리움의 대상은 무엇일까? 단번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가며 그리움의 대상을 샅샅이 뒤진다.
지금 나의 나이는 28살.
시계를 4년 전쯤으로 돌린다. 그때의 나는 이제 막 타지로 신규발령을 받은 어리바리한 초임교사였다. 돈도 없었고, 아는 사람도 없었고, 군대도 아직 필하지 못했다. 그다지 그리워할 만한 대목이 떠오르지 않는다.
시계를 좀 더 돌려 8년 전쯤으로 가본다.
20살이다. 대학에 막 입학한 새내기였다. 낮에는 테니스를 치고 밤에는 매일 술을 마셨다. 모든 행위의 방향은 즐거움이었다. 이 정도면 그리워할 만하지만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 왜일까.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시계를 다시 돌린다.
학창 시절쯤이다.
많은 사람들이 학창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나는 학창 시절에 공부도 못했고, 부모님에게 혼도 많이 났다. 더군다나 그때에는 부모님이 많이 싸웠다. 부모님이 싸우신 날에는 혹시 밤중에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귀를 쫑긋 새운 채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리워하고 싶지 않다.
어린 나의 기억은 희미하다.
부모님께는 우스갯소리로 어렸을 때 많이 맞아서 뇌세포가 죽은 이유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냥 나의 해마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 하고 기억을 덮는다.
그리움의 대상이나 시절이 없다.
굳이 무언가를 그리워하려면 그리워하겠지만 "확실히 이게 나의 그리움이다!" 할 만하지 않다. 왜일까 생각한다. 한동안 생각한다. 생각하다 보니 어떤 실마리가 잡힌다.
혹시 지금의 내가 그리움을 필요로 하지 않은 건 아닐까?
무언가를 그리워하기엔 지금의 나는 유례없을 정도로 행복하다. 지금 나에겐 결핍이 없다. 나의 건강과 직장과 사랑이 있다. 내 가족의 건강과 평화가 있다. 지금이 나의 역사에서 가장 행복하다. 평행우주 속에 있는 어떤 나보다 이곳의 내가 가장 행복한 존재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덜 행복했던 과거를 그리워할 필요가 없다. 나에게 그리움이 없는 이유다. 나는 완벽히 행복하다. 생각이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지금 내 주변의 존재들은 언젠가 나의 곁을 떠날 것이다. 모든 존재는 유한한 법이니. 그때에는 지금이 나의 그리움이 될 것이다.
나는 그리워할 때 아프고 싶지 않다.
엄마나 아빠는 언젠가 내 곁을 떠난다. 그리워할 것이다. 엄마에게, 아빠에게 사랑한다고 자주 말하지 못했다고 후회하고 싶지 않다.
지금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훗날 내 그리움의 감촉이 된다. 그러니 내 그리움을 푹신하고 부드럽게 하련다.
오늘은 엄마에게 전화 한 통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