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람 Nov 12. 2019

아이들을 위해서는 차라리 영혼 없는 시선이 낫겠는걸

김영하 [여행의 이유]

그렇다면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독서 또한 작가가 지어놓은 활자의 세계를 방문하는 것이기에 여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독후감은 여행기이다.


이번 나의 여행지는 [여행의 이유]였다.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은 [여행을 왜 떠나는가에 대한 답변을 얻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시련은 없었기에 [피로] 정도라고 해둔다. 이제 남은 것은 내가 여행을 통해 얻은 어떤 다른 것인데, 이것이 바로 독후감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내가 얻은 다른 어떤 것은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정체성]에 관한 어떠한 생각을 하게 한 것은 다음의 구절이다.

아무것도 아쉬울 것이 없는 무인도에 도착했지만 오디세우스의 마음은 어딘가 허전했던 것이다. 말 못 하는 염소 떼뿐이었던 것. 배가 채워지자 그의 마음속에 다른 욕구가 고개를 들었다. 인정의 욕구. 낯선 땅에 사는 존재로부터 찬사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고향 이타케에서는 왕이었고, 트로이에선 영웅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언제나 섬바디였다. 그런데 이제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의 정체성은 스스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타인의 인정을 통해 비로소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정체성은 자존감과도 관련이 깊다. 내가 여기에 있으며, 어떤 사람으로 규명되는지가 자존감의 튼튼한 기둥 역할을 한다. 이는 실제 나의 경험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나는 대체로 자존감이 높은 편이다. 그러한 나의 자존감이 바닥을 친 때가 있었는데, 바로 훈련병 때였다. 훈련소에 입소하기 전 나의 정체성은 임용고시를 한 번에 통과했을뿐더러 앞선 등수로 3월 1일 발령을 받은 청년 취업난 속 이른 취업을 한 승리자였다.(그때의 오만방자한 생각이기도 했다.) 그런데 훈련소에 입소하자마자 나의 정체성은 47번이나 58번인가 하는 훈련병으로 대충 분류될 뿐이었다. 뭐랄까. 나 홀로 빛나던 북극성에서 흔하디 흔할뿐더러 존재가치가 없는 차가운 얼음덩어리로 격하되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나의 의지와는 별개로 타인이 부여한 나의 정체성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군인다워졌다고 여겨지는 작대기 두 개, 일등병이 되어서야 겨우 자존감이 꿇었던 무릎을 피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정체성은 대부분 교실과 가정에서 규정되어진다. 각각의 장소에서 규정되는 정체성은 조금 다른 형태이지만 서로에게 강한 영향을 미친다. 가정에서의 정체성은 부모나 형제로부터 규정될 것이다. 부모가 아이를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내가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교실에서의 정체성이다. 교실에서의 정체성은 친구들과 교사에 의해서 규정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교사의 시선이 친구들의 시선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이런 경험이 직. 간접적으로 있을 것이다.


선생님: "xx야 너 또 말성이니?"

친구들: "어휴 쟤 또 저런다."


선생님은 교실에서 절대자 혹은 솔로몬으로 여겨진다. 선생님이 어떤 아이를 미래가 유망한 아이, 빠짐없이 완벽한 아이로 여기고, 바라보고, 칭찬을 하면 그게 그 아이의 정체성이 된다. 반대로 어떤 아이에 대한 냉소 어린 시선, 반복된 지적, 실망감의 표현은 그 아이의 정체성을 말썽꾸러기, 천덕꾸러기, 문제아로 만든다. 그렇게 규정되어지는 것이다. 선생님이 그렇게 판단했으니깐.


여기까지 왔으니 결론은 정해져 있는 법이다. 아이를 편견 없이 바라보아주어야 할 것.

그러나 안타깝게 현실세계에서는 그와 같은 일들이 굉장히 버겁다. 선생님들은 사이코가 아니기에 그냥 재미로 아이들을 타박하거나 지적하거나 짜증 섞인 표정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어쩔 수가 없다. 선생님도 사람이기에 말썽이 반복되고, 했던 말을 또 하게 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감정이 없는 인공지능에게 선생님을 맡길 수는 없는 법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명확한 한 줄 짜리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답이 없는 물음이 깊은 물음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는다. 그래서 이렇게 결론을 내려본다.


차라리 영혼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아이들이 미성숙한 행동을 했다면 행동에 대한 수정과 지도는 하되 판단을 제외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들을 여행자로 여기는 것이다. 다만, 특정한 그때를 제외하고는 아이들을 따스하게 바라보아주자. 그들의 정체성이 단단해질 수 있도록.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과 맞서기도 해야겠지만,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사회는 왜 피로한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