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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Aug 21. 2023

'감자'에 '감사' 하는 마음

소식좌의 1식 일기 열한 번째

오래전, 서울생활을 접고 귀농을 택한 선배 한 분이 계신다. 지금이야 영락없는 초로의 농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대학시절 내가 알던 선배는 '책상물림'한 선비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얼굴 전체를 감싼 커다란 안경을 끼고 시집을 읽곤 하던 대학 학보사 문화부 선배. 그와 함께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나 가끔 그의 안부와 그가 산다는 자연의 품이 궁금하곤 했다.


그래서 책이 나올 때마다 아이가 성적자랑을 하듯 선배에게 소식을 전한 건지도 모르겠다. '선배, 선배 저 봐봐요, 저 열심히 쓰고 공부해서 책을 펴냈어요. 잘했죠?'라는 말을 꾹, 꾹 눌러 담아 책을 챙기고 작은 엽신을 얹어 우체국으로 달려가곤 했으니. 어찌 이번이라고 다르겠는가.


선배가 계신 곳의 작은 마을 도서관에 기증도 할 겸( 내심 칭찬받고 싶은 마음도 전할 겸) 몇 권의 책을 챙겨 택배로 보냈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은근히 인정욕구가 강한 사람이라 그런지는 모르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주 오래전부터 내 하찮은 '才'를 알아보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선배에게 만큼은 "야~~!! 참 애썼네, 수고했네."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게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책을 싸 보낸 지 며칠이 지났을까,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친 묵직한 상자 하나에 나는 속절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10kg들이 상자에 가득 담긴 건, 막 캐내 흙이 묻어 있는 감자였다. 다섯 살 아이의 주먹만 한 앙증맞은 감자가 모양이 제각각인 채 들어있는 상자였다. 사실 무게도 생각보다 무거웠지만 함께 실려온 선배의 마음이 순간 느껴져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내 휴대폰을 울리는 선배의 문자, '유기농이라 모양이 들쭉날쭉이야, 삶아서 먹으려무나. 그리고 책은 왜 그렇게 많이 보냈어? 고마워. 너의 열심과 정진을 응원할게.' 몇 줄 되지 않는 문자를 읽는데, 눈시울이 붉어져왔다.


책을 받아 들고는 기뻐하고 흐뭇해했을 선배의 따스한 마음이 감자 한 알, 한 알에 실려 무게를 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배송된 귀한 감자 한 상자를 앞에 두고 마음이 하지감자를 쪄냈을 때처럼 포실포실하게 부풀어 올랐다. ' 이 많은, 이 귀한 감자를 어떻게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우선은 유기농이기에 오래 저장할 방법을 제일 먼저 궁리한 다음, 소분 을 하고 동생과 친구들에게 나눠줄 것도 챙겼다.


달랑 두 식구가 먹어야 얼마나 먹겠는가. 해서 감자 한 알, 한 알을 신문지로 감싸 볕이 잘 들지 않는 곳에 잘 보관해 둔다. 감자보다는 고구마를 더 좋아라 하는 나지만 차분하게 앉아 감자로 할 수 있는 모든 요리를 떠올려 보기 시작했다.


맑은 육수에 청양고추만 넣고 끓인 감잣국에서 시작해, 돼지고기와 애호박을 뭉텅뭉텅 썰어 넣고 고추장으로 간한 감자 짜글이, 채를 가늘게 썰어 호박 당근 등속과 튀겨낸 채소튀김도 좋고 강판에 갈아 부쳐낸  감자지짐이도 여름날의 별미 일테다. 하지만 그 모든 음식들보다 순간 군침을 돌게 한 건 바로'감자조림'이었다.


'감자조림'은 여름에 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늘 밥상에 올라오던 반찬이었는데, 그 항시성 때문인지 가끔은 쳐다보기도 싫은 지점이 오곤 했다. 철없을 때는 단맛도 별로 없고 퍽퍽하기만 한 감자의 속성도 별로였고, 못 생기거나 촌스런 이를 두고 '감자'같다 놀리는 풍습에도 진저리가 났다. 그래서 하지에 수확해서 먹는 '하지감자'의 알싸한 햇맛을 알게 된 것도 어쩌면 최근의 일일게다.


신문으로 싸지 않고  따로 골라둔 감자 몇 알의 껍질을 얇게 깐다. 흐르는 물에 전분기만 가시게 두어 번 씻어서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썰어둔다. 쌀엿을 넉넉히 둘러 한 30분쯤 재워두면 삼투압으로 감자에서 물이 나와 자작해진다. 여기에

살짝 식용유를 두르고 직접 만든 맛간장으로 간을 맞춰 중불로 졸인다. 아, 맛간장으로 간을 했지만 풍미와 식감을 위해 맛술도 더해주면 좋다. 국물이 거의 다 감자에 스며들었다 싶으면 참기름을 적당히 두르고 섞어준 다음 불을 꺼준다.


소식좌의 여름 한 끼 식사를 책임져 줄 훌륭한 반찬이 완성되었다. 예전에 싫어하던 음식들이 입에 맞기 시작하면 나이가 든다는 증거랬던가. 너무 흔해서, 너무 자주 보여서 내게 사랑받지 못했던 '감자조림'이 이젠 여름날 지쳐가던 몸에 작은 에너지를 선물해 주니 나이 듦도 이런 때는 썩 괜찮은 일 아닐까.


'감자'의 다른 이름은 어쩌면 '감사'인가 보다. 선배의 정성과 굵은 땀방울이 알알마다 배어 있을 '감자'로 만든 조림을 천천히 씹으며 내게로 오는 모든 것들에 감사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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