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 회사에 다니는 누구'가 되지 않기
며칠전 나를 첫 정규직 자리에 뽑아주셨던 팀장님과 점심을 먹었다.
다른 회사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회사에서는 '나를 뽑아준 팀장님'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었다. 모두가 자신을 뽑아준 팀장님을 기억하고 있었고 특별하게 생각했다. 나 또한 그랬다. 입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희망퇴직을 하신 이 팀장님과는 고작 1년 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나를 뽑아주신 팀장님으로, 또 유쾌하게 인생에 대해 여러가지 조언을 해주신 분으로 강렬하게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퇴직을 하신 후 연락이 잘 되지 않았던 그는 문득 2023년 가을, 먼저 카톡을 주셨다.
연락이 없었던 2년 동안 공부를 해서 어떤 자격증을 따셨다며, 시험 공부를 하는 동안 세상과 연을 끊고 살아 그동안 소식이 없었다고 하셨다. 나는 그간 이직도 했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들으시더니 너무 잘됐다고 누구보다 좋아하셨다. 그렇게 3년만에 같은 팀이었던 분들과 만나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며 들어보니, 육아와 공부를 병행하다 갑자기 큰 병을 앓으시고 더더욱 세상에서 멀어지셨다고 했다. 그토록 술과 담배를 좋아하셨던 분이 지병으로 술대신 물을 드시는 모습을 보며 안쓰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히 공부를 이어나가 결국 원하던 자격 취득에 성공하신 것이 진심으로 대단해 보였다.
그날 저녁, 팀장님은 우리에게 "너네는 회사 밖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냐?"라고 질문하셨다.
셋은 각자 해보고 싶은 것들을 조금씩 얘기했는데, 나역시 하고싶은 것은 무궁무진하게 많아서 이것저것 떠오르는 대로 모두 얘기해 드렸다. 팀장님은 하고싶은 일이 많은 것은 역시 좋은거라며, 꼭 지금부터 회사 밖에 하고싶은 일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해두라고 하셨다. 그날 남은 얘기는 그게 8할이었다. 너무 회사일에만 집중하지 말고, 어느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게 되더라도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파두라고.
퇴직 후 되돌아 본 20년이 넘는 본인의 커리어는 생각보다 별게 없었다고 한다.
잘나가는 외국계 금융사에서 영업과 기획, 마케팅까지 섭렵하며 팀장자리까지 꿰찼던 그였지만, 회사를 나와서 돌아보니 회사 밖에서는 영 쓸모가 없었단다. 그가 일했던 때는 한창 회사가 잘되던 시기였기에 더더욱, 회사를 마치면 동기들과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저녁에 반주하기 바빴고 그게 삶의 낙이었지만, 지나고보니 젊었던 그 시간에 다른 길을 하나 더 마련해둘걸, 이라는 후회가 남았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팀장님과 새해 인사를 나누다가 점심 약속을 잡았다.
이번 점심에서도 유사한 얘기를 하셨는데, 이번에는 전 회사의 사장님이었던 분 얘기를 들려주셨다. 사장님 역시 그가 퇴직했던 비슷한 시기에 퇴사하셨고, 4~5년 정도 쉬고 계시다고 했다. 아직 50대 중반밖에 되지 않았는데, 100세 시대에 너무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할 일이 마땅히 없어 불안해 하신다고 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는 계속 일이 있었고, 사장님이었으니 아랫사람들이 일을 다 처리해줬지만 막상 나오고 보니 혼자 할 수 있는게 없었다는 거다. 지금은 오래 쉬시다가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려고 하니 용기도 잘 나지 않고, 무엇을 해야할지 길찾기를 어려워하신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보니 조금 멍했다. 예전에 한 다큐에서, 수명이 길어지며 비교적 은퇴 시기는 빨라지는데 과연 은퇴 후 어떤 제 2막을 맞이할 것인가를 주제로 다룬 것을 보았다. 그 영상에서 다룬 내용이 내앞에 실제 사례로 등장한 것이다. 고등학생 때는 대입을 위해, 대학생 때는 취업을 위해 살았다. 취업한 후에는 여러가지 선택의 갈래들이 있겠지만 누구나 부러워하는 사장의 자리까지 승승장구를 해도, 은퇴를 하고나면 어떤 것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르는 길잃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헤어진 후 팀장님은 내게, 넌 아직 젊으니까 10년, 15년에 걸쳐 하고싶은 일을 찾고 기반을 구축해 두라고 하셨다. 그렇게 조금씩 기반을 만들어 두면 나이가 들어서 갑자기 일터를 잃게 되더라도 나만의 아이덴티티가 확고하니 삶의 방향성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부디 회사일에만 집중해서 나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신입사원 때 나의 목표가 바로 '000 회사에 다니는 누구'가 되지 않기 였다. 회사와 직무 이름을 제외하고도 나를 정의할 수 있는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기. 하지만 일을 시작한지 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이 블로그 기록 역시 올해들어 새로이 해보고 싶었던 일이고, 언젠가 이런 기록들이 모여 내 유산이 될거라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다. 이외에도 하고싶은 일, 벌이고 싶은 사업도 많은 나인데 팀장님의 얘기들을 마음 속에 각인한 채 늦더라도 꾸준히 삶의 기반을 다지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