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모든 것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IT와 미디어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정말 갑작스럽게도 한 외국계 보험회사의 마케팅팀에 취직하게 된다. 원래 가고 싶었던 기업들은 내게 최종 탈락을 고했고, 쓰디쓴 취업시장 맛을 본 후 수시채용으로 열린 공고에 덜컥 합격한 것이다. 몇 달에 걸쳐 최종적으로 탈락 통보를 한 대기업들과 다르게 채용 프로세스가 굉장히 시원시원했다. 서류 넣은 다음날 합격 통보, 그다음 주에 1차 면접, 그리고 선 채용검진 후 임원면접... 모든 것이 2020년 1월 한 달 안에 이루어졌고, 최종 합격을 받은 날이 금요일이었는데 갑자기 그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을 하랬다. 사실 다른 회사 면접도 잡혀있는 상태였고, 취업하고 나면 여행도 가고 싶었는데 이틀밖에 시간을 주지 않은 회사가 조금 원망스럽긴 했지만 어쨌든 처음으로 정규직에 합격한 터라 출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이 공고에 지원했던 것은 그저 직무 때문이었다. 회사나 보험업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 나는 특히나 경영학도 중에서도 금융 관련 과목들은 깔끔히 버린 사람이었기에 더더욱 - '마케팅'이라는 직무와 콘텐츠 제작, 브랜드 관리를 한다는 상세 설명 하나만 바라보고 지원했다. 기존에 해왔던 대외활동이나 수상경력, 인턴 경험이 모두 마케팅 관련이었던 덕에 합격은 했지만 출근하기 전 주말에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느라 애를 많이 썼던 기억이 난다.
과연 내가 이 회사에 가서 잘할 수 있을까?
여기가 내 첫 직장이어도 나중에 후회가 없을까?
내가 생각하고 꿈꾸던 커리어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인턴을 하면서, 그리고 다른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첫 직장의 중요성'에 대해 숱하게 들어왔었던 나는 내 커리어 패스가 가장 걱정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첫 직장으로 무조건 대기업을 추천했고, 또 추후를 생각해서 이직하기 좋은 업계와 직무로 첫 단추를 끼워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내가 꿈꿔왔던 일은 IT회사에서 마케팅을 하거나 이벤트를 기획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는데, 과연 첫 직장으로 이곳을 선택하면 내가 그리던 일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이 뜨거운 취업 불시장에 어렵사리 얻은 기회이니 만큼 일단 출근하고 보자는 마음이 컸고 그렇게 내 첫 정규직 근로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여담이지만 입사하고 고작 2주 뒤에 코로나19 사태가 터져 취업 시장은 더욱 헬이 되었고... 나는 어찌 됐든 운이 굉장히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반신반의하며 시작한 나의 첫 직장생활은 2년 3개월이 지난 2022년 5월을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지금의 나에게 위의 세 질문을 던진다면 "잘할 수 있다", "후회 없다", "만들어 갈 수 있다"라고 긍정적인 답변을 늘어놓을 것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원하던 곳으로의 이직에 성공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1, 2번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우고 스스로 성장했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잘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일단 모르겠고, 열심히 일해보지 뭐. 그러다 보면 또 길이 생기겠지.'
이게 입사 초 내 마음가짐이었다. 쓰고 보니 자기 자랑인데 난 늘 이 마인드셋이 내 최고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남들한테 인정받는 걸 좋아해서,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하고 ➡️ 칭찬받으면 더 열심히 하고의 순환이 생기게 되는 듯. 아무튼 나는 2년 3개월 동안 패기 있는 신입사원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보니 처음 입사할 때 가지고 있던 회의감도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열심히 하고 있으니 멀리 보았을 때 결국 옳은 길로 가고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으로 나 자신을 믿고 긍정적으로 일했다. 나름 나만의 일하는 영역도 만들어보고, 어떤 업무 하면 내가 떠오르도록 해보기도 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기도 하고.
고작 2년 남짓한 짧은 경력이지만 그 시간을 불태워보니 퇴사할 때 일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다. 인사부와의 퇴사 면담을 할 때 "업무에 대한 미련이나 아쉬움은 없나요?"라는 질문을 받고 곧바로 "네 없어요! 저는 할 수 있는 것, 해보고 싶은 것 모두 충분히 해본 거 같아요."라고 했다. 인사담당자는 굉장히 듣기 좋은 말이라며 웃었다. 주니어 사원인 내가 업무에 대한 미련이 없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회사가 나에게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니.
하루하루 열심히 임하다 보니 그 일일의 조각들이 전부 내 경력 한 줄일 뿐만 아니라 자신감의 원천이 되었다. 더 좋은 길을 개척해 나갈 것이라는 자신감.
사실 이게 훨씬 중요하다. 어떻게 보면 운의 영역이라 할 수도 있겠다. 좋은 상사, 동료들을 만나는 것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난 참 운이 좋게도 좋은 사람들만 골라 만났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많이 해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나를 믿고 기회를 준 분들 덕분이었고, 인정받으면 더 열심히 하는 나에게 아낌없는 칭찬과 가르침, 조언을 준 사람들이 있어서 성장할 수 있었다. 업무 방식에 있어서 당연히 맞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또 그대로 많은 교훈을 주었다. (기억 미화인가?)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더욱 확신하게 된 것은 퇴사 사실을 밝혔을 때부터다. 현재 회사에 최종 합격했을 때 나는 회사에 있었는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합격해서 기쁘기도 하지만 이 좋은 동료들에게 어떻게 퇴사를 말해야 하나 깊은 고민에 사로잡혔다. 집에 와서 '좋은 퇴사' '퇴사 잘하는 법'을 검색해보기도 했다. 팀 전체가 한창 바쁜 시기였기 때문에 더 미안해서 쉽사리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회사를 나온 친구가 있었는데 "네가 어려서 잘 모르는 것"이라며 구슬려보려던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것을 보고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이직하게 되었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걱정했던 것과 달리 너무나 따스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좋은 직원을 잃으니 슬프지만, 개인의 성장을 위해서는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옳다며 축하와 응원을 받았다. 내 빈자리가 크겠지만 사람 하나가 빠져도 잘 굴러가야 제대로 된 회사라고, 그건 남은 사람들의 몫이니 걱정 말고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준비하라고 했다. 부장님의 "그간 마음고생 많았겠네요"라는 말 때문에 울 뻔 하기도. 그동안 낮에는 회사일, 저녁에는 이직 준비하며 마음 졸였던 것들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출근날 가까이 지내던 다른 부서 사람들까지 아쉬움 반 축하 반인 악수들을 나누고, 건물을 나오면서 이곳에서 첫 직장 생활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사회'생활이니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중요한데 모두가 함께 퍼즐을 잘 맞춰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참 행운아야!
이렇게 막을 내린 어린 내 사회생활의 첫 발은 또 많은 고민과 숙제들을 안겨주었다. 첫 직장에 입사할 때 했던 고민들과는 달리, 이번에는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을지, 경력직이 된 지금은 예전과 달리 누가 일을 가르쳐주지 않는데 스스로 어떻게 헤쳐나갈지에 대한 생각이 많다. 또 달라진 점이 있다면 신입사원 때는 이 고민들이 순수 걱정이었지만 지금은 이 고민들이 결국 양분이 되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발전할 것임을 안다는 것이다.
취준생 때는 가고 싶은 회사 이름만 보기 마련인데,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이 회사를 다니면서 많이 깨달았다.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의외로 나와 잘 맞는 일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일단 부딪혀서 노력하다 보면 어떻게든 더 좋은 방향으로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나의 첫 직장 기록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