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영화는 몇 번이고 다시 보는 편이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감상회차를 늘린다. 어제까지만 해도 영화 <윤희에게>를 다섯 번 보았다. 오른손만으로 셀 수 있었는데 오늘부터 왼손도 써야 한다. 과정도 결말도 어떤 장면에선 고양이가 어떤 울음소리를 낼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좋다.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매번 내가 알지 못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말했다. 같은 영화를 볼 때마다 다른 모습과 감정을 발견하는 건 그만큼 내가 달라졌다는 징표라고. 내가 같은 영화를 여섯 번이나 찾아보는 건 나의 성장을 측정하기 위한 척도 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긴장시키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특히 좋아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에 취약하다. 갑작스러울수록 더더욱 당황스럽다. 너는 왜 나를 좋아한다던지,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다던지. 나는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오만가지 생각들이 튀어나온다. 나의 생각엔 발이 달려 있지만 눈은 없다. 유리병에 갇힌 줄 모르고 자꾸만 굴절된 벽에 머리를 박는 파리처럼 서로 우왕좌왕하다가 발을 접질린다. 접질린 생각은 표정으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내가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하나 있다. 영화 <윤희에게>에서 어떤 장면을 가장 좋아하느냐는 것이다. 아주 구체적으로 꼽을 수 있는 두 가지 씬이 있다. 하나는 윤희가 준의 편지를 받은 다음날, 출근 대신 기찻길을 걷는 걸 택한 하루였다. 기찻길을 따라 걷는 윤희의 뒷모습. 윤희의 발걸음에 담긴 박자는 고민하는 이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누구나 쉬이 따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윤희의 리듬을 담은 카메라의 앵글이 흔들린다. 갑자기 윤희 옆으로 기차가 지나간다. 이미 시대 하나를 풍미했던 기차다. 동시에 윤희는 고개를 돌려 지나가는 기차를 본다. 기차의 꽁무니가 저만치 멀어지자 윤희는 기차가 지나온 길을 바라본다. 시선을 따라 조금씩 몸이 따라 돌아간다. 여전히 윤희를 담은 화면은 미약하게 흔들린다. 점점 윤희가 무엇을 바라보는지 알 수 없게 되며 윤희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의 눈시울에서 여러 감정이 읽힌다. 같은 장면이지만 나는 그 눈시울에서 새로운 감정을 읽는다. 몇 번을 다시 보아도 어떤 단어나 문장으로 요약되거나 쉬이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이다. 표정이 삶과 겹쳐지는 순간이다.
이번 회차에선 그의 눈시울에서 윤희의 마음을 보았다. 과거로부터 흩어져버린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사람, 그걸 다시 주워 담고 싶어 하는 사람의 마음이 비쳤다. 시간에 흩어져버린 것들을 다시 상기하는 건 어떤 도움이 되는 걸까? 과거를 자꾸만 되돌아보는 일이 미련한 일이 될 때가 있진 않은가. 혹은 때를 놓친 감정처럼 아쉬움과 후회의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덧없진 않을까?
내가 좋아하는 두 번째 씬에선 흩어져버린 것들을 주워 담은 사람의 눈빛이 등장한다. 영화가 마무리되면서 윤희가 준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어주는 내레이션이 지나간다. 들려오는 편지가 실제로 준에게 닿았는지 여전히 부쳐지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내레이션은 그녀가 새로운 도전을 앞둔 공간 앞까지 이어진다. 영화가 끝나갈 때면 이 장면이 다시 떠오른다. 그녀의 눈은 기찻길에서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 역시 쉬이 요약될 수 없다.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이 담겨 있는 눈이다. 새로운 길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동안 뒤에서 등을 밀어주는 누군가가 있는 사람의 것이다. 표정이 미래와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런 눈을 보면 누구나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다. 응원하는 마음은 스크린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검은 화면에서 마음이 튕겨져 나와 나에게 닿는다. 윤희의 미래를 응원하면서 정작 위로를 받는 건 나 자신이었다. n회차에 걸쳐서도 변하지 않는 몇 안 되는 감정 중 하나다.
내가 이 영화를 찾는 건 내 안의 마음이 흩어졌다고 느껴질 때다. 나의 마음은 곳간처럼 되어 있어 좋아하는 것들로 차곡차곡 채워 넣는다. 내가 외진 골목 사이에 있는 카페를 찾아내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순 없지만 마음의 여유나 에너지를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마음이 소진되었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내가 처한 근무환경에서는 평소처럼 소진된 마음을 채워 넣을 수 없다. 나는 배를 타는 일을 한다. 근무환경과 휴식공간을 육지와 바다로 나누는 범지구적인 구별법을 가지고 있다. 이 업계 종사자가 아닌 사람들은 일이 고되지 않냐는 질문을 많이 하지만 정작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거리감이다. 요즈음에는 기술의 발전으로 카톡이나 저용량 사진을 몇 장 주고받을 순 있지만 그마저도 통신위성이 고장나버리면 무용지물이 된다. 간혹 일이 밀물처럼 몰려올 때면 속수무책으로 개인 시간이 젖어버린다. 나는 그걸 말리기 위해선 잠을 잘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루가 다 지나가버릴 때가 잦았다. 피로에 젖은 침대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눕힐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문득 불 꺼진 천장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할 때였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 흩어져버리고 있는 마음이 있진 않을까? 흩어진 마음만 남은 나는 윤희의 두 눈시울 사이에 끼여있는 찌푸려진 미간이다.
눈과 평화와 온기와 고요가 가득한, 준의 말처럼 윤희와 닮은 공간, 오타루에서 윤희는 흩어져버린 것들을 주워 담았다. 누구 하나 그것을 흩트려버리지 않음에도 흩어져버린 것을 담았다. 흩어져버린 조각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건져 올린 자의 눈빛은 이전과 사뭇 다르다. 상기되어있으며 긴장되어 있다. 하지만 아름답다.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 자라면 비슷한 눈빛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나는 윤희의 눈빛에서 그가 미래를 직시할 힘을 얻었다고 보았다. 그건 나에게도 필요한 힘이다.
영화가 끝나면 나도 과거로의 여행을 떠난다. 사람 키만큼 쌓인 눈은 없지만 끝을 알 수 없는 하늘과 바다가 가까이 있다. 순수한 색감을 가진 하늘과 바다를 마주하며 나의 마음에서 흩어져버린 것들을 하나씩 주워 담아본다. 윤희의 카메라로 찍은 준의 사진처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순간이 담긴 사진, 방아가 잔뜩 들어간 된장찌개를 내어줄 때의 할머니의 주름진 미소, 친구들과 탄성을 지르며 마주했던 핑크색 하늘. 밤 산책에 동행하며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 내 마음에서 흩어졌던 조각들을 이어 붙이다 보면 조각과 조각을 붙일 수 있는 본드가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마치 소진된 적 없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