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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 Apr 19. 2024

뉴욕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달리기

낯선 곳에서 달리기

(이 글은 3월 3일부터 4월 12일까지 연재한 ‘뉴욕에서 보낸 편지’의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뉴욕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달리기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가볍게 커튼을 젖히듯 스르르 눈꺼풀이 올라간다. 너무 자연스럽게 눈이 뜨인 탓에 꿈인지 아닌지 헷갈린다. 온몸의 감각에 집중해 보기로 한다. 평소 잠에 드는 자세 그대로다. 잠꼬대할 틈도 없이 잠들었나 보다. 등줄기를 타고 엉덩이와 허벅지, 종아리를 타고 발뒤꿈치까지 침대 사이에 한 치의 여백 없이 밀착되어 있다. 분명한 현실이다. 긴 비행으로 부풀어 오른 피로가 침대 위로 나를 짓눌렀나 보다. 그럼에도 몸 구석구석이 가볍게 느껴진다. 자는 동안 꼼지락거릴 틈도 없이 자버린 셈이다. 다리가 간질거린다. 온몸이 침대서 빠져나올 준비가 되었다고 신호를 보낸다. 발목을 앞뒤로 까딱거리며 종아리를 이완한다. 개운하다. 개운함으로 종아리는 온몸에 답신을 보낸다. 이렇게 나와 몸은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다. 산책하러 가자고 문 앞에 서있는 강아지에게 내가 목줄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어젯밤 대충 흩트려둔 캐리어에서 반팔과 반바지를 꺼낸다. 옷을 입으면서도 위화감을 느낀다. 평소라면 옷장 안에서 운동복을 꺼냈을 테니까.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달리는 건 처음인지라 운동을 준비하는 것도 어색하다. 양말을 신는다. 똑같은 양말 한 짝임이 분명한데 짝짝이로 신은 기분이다. 괜스레 발을 요리조리 쳐다보지만, 찜찜함은 영 풀리지 않는다.


 서늘한 거실을 지나 신발을 신은 뒤 계단을 타고 현관으로 내려간다. 문을 열자 두 볼에 가장 먼저 바깥 공기가 닿는다. 바람막이를 입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간단하게 몸을 풀어준다. 목부터 발목까지, 위에서 아래로, 순서대로 관절과 근육을 이완한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근육에게 그들만의 언어로 말을 건넨다. ‘너네 곧 있으면 움직여야 해‘. ’너희가 이 서늘함을 시원함으로 바꿔줘야 해’.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스포티파이에서 아껴둔 아이유 신곡을 고른다. 처음 오는 공간에서 처음 듣는 노래가 어울릴 것만 같아서. 나이키 러닝 클럽 앱을 켜고 회복 러닝 수업을 선택한다. 상쾌해지고 싶어서.


 경험상 회복 러닝 수업의 코칭에 따라 페이스를 맞출 때 상쾌함이 가장 극대화되곤 했다. 회복 러닝엔 온몸에서 느껴지는 가벼운 열감과 피로에서 벗어난 감각에서 나오는 상쾌함이 있다. 거기엔 약간의 중독성도 있어서 러닝 수업이 끝났다는 알람이 울린 뒤에도 조금 더 달리게 되곤 한다. 성취감에서 비롯된 건 아니다. 회복 러닝에선 거리나 속도를 정하고 뛰는 게 아니니까. 더 뛸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나 체력적 여유가 상쾌함으로 치환된 걸지도 모른다. 러닝에서, 여행지에서 태어난 상쾌함이 이번 여행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거라 나도 모르게 확신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캐리어에 운동복을 넣었고, 지금 달리러 나왔다.


 ‘3, 2, 1 시작’. 카운트다운이 끝나자마자 오른발을 힘차게 내디딘다. 오른발이 땅에 닿은 잠깐의 순간, 체중을 실어 땅을 꾸욱 누른다. 콘크리트 보도에 내 발자국이 찍힐 일은 없지만 여기서부터 오늘의 달리기가 시작됐다는 걸 기억하고 싶다. 다음 발자국부턴 힘을 빼고 편안하고 느리게 뛴다. 아니, 지금보다 더 느리게 뛰어야 한다. 처음부터 빠르게 뛰면 같은 거리를 가더라도 더 빨리 지친다. 더 느리게 뛰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 있는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고 온몸을 위아래로 흔들며 뛰는 데에 집중하는 거다. 위아래로 몸을 흔들다 보니, 어쩌다 보니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느낌으로. 보폭을 좁히고 천천히 다음 발을 뻗는다. 그러면 온몸으로 중력이 전해진다. 지구가 천천히 가라고 뒤에서 잡아당겨 주는 것만 같다.


 목표지점이나 코스 따위는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달리기로 한다. 아무 생각 없이 숙소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정했고 이후엔 즉흥적으로 가고 싶은 방향으로 달린다. 갈림길 앞에서 가고 싶은 방향을 정하는 동기는 다양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을 것 같은 넓은 길을 고르거나, 산책 중인 귀여운 강아지가 보이면 가까이서 눈인사라도 하고 싶어 그쪽으로 달린다. 한국에선 들어보지 못한 새소리가 들리면 그 새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생겼는지, 특이하게 생긴 건물은 무슨 용도인지 궁금해진다. 궁금하면 가까워지고 싶어진다. 그래서 달려간다. 천천히, 천천히. 그게 제일 중요하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왼발에는 호기심을, 오른발에는 회복 러닝이라는 신발을 신고 달린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균형을 잡으려고 한다. 다시 음식점이나 카페 앞에 사람들이 줄서있으면 무슨 메뉴가 인기가 많은지 힐끔 쳐다본다. 등교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어디에 학교가 있는지 궁금해하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본다. 건널목을 건너야 할 때면 신호등이 켜져 있는 쪽으로 향한다. 신호등이 꺼져있으면 기다리는 대신 모퉁이를 돈다. 어쩔 땐 내가 건널목 앞에 도착하자마자 건너는 신호로 바뀌는데 마치 이쪽으로 가면 된다고 신호등이 길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렇게 달릴수록 기분 좋은 우연도 쌓인다. 다가올 상쾌함에 곁들이기 좋은 향신료가 하나씩 늘어간다.


 숨이 가빠진다. 나도 모르는 사이 달리는 속도가 빨라졌다는 걸 깨닫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 코칭은 듣지 않고 노래에 빠져버렸다. 마치 어릴 적에 저 혼자 같은 색의 보도블록만 밟는 놀이를 하는 것처럼 템포에 맞춰 발을 내딛고 있었다. 처음으로 낯선 곳에서 달려선지 혹은 여행이 주는 고양감에 사로잡힌 건지 모르겠지만 내 페이스를 놓쳤다. 속도를 줄이고 잠시 코칭에 집중한다. 지치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내 몸에 집중한다.


 갑자기 시야가 확 넓어진다. 안정적인 페이스에 접어들었다는 증거다. 이젠 더 많은 것들이 보인다. 주차된 자동차 아래에 웅크려 있는 길고양이, 건물 창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비둘기 떼, 바닥에 떨어진 빵가루를 주워먹는 참새 몇 마리, 멀리서 들려오는 전철 소리, 카페에서 스며 나오는 은은한 커피향. 이 모든 게 빠르게 모여 한 장면 안에 담긴다. 빨라진 심장박동과 노래의 템포는 이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두드린다. 달리면 달릴수록 내가 뉴욕에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나르고 있는 것만 같다.


 때마침 러닝 코치가 이렇게 말한다. ’러닝의 발전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 처음에는 집 근처 동네를 뛰었다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달리는 것도 발전입니다. 새로운 형태의 달리기라면 발전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어요.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달리기는 매번 다른 형태를 띠게 될 거고 이건 우리가 달리기를 통해 평생 배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사실 걸으면서도 낯선 곳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오히려 감상할 시간이 더 많다는 점에서 달리기보다 더 많은 걸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리면서 바라보는 여행지는 매력적이다. 일정한 근력과 끊임없는 호기심 사이에서 균형감각을 잃지 않도록 집중하는 상태, 나만의 페이스로 달리는 일은 새로운 환경에서도 나를 잃지 않을 것만 같다는 확신을 준다. 여행에서 만나는 모든 순간에게 더 큰 애정을 보낼 힘이 딴딴해진 종아리에서 올라온다. 작지만 꾸준하게 나만의 페이스를 가진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이되는 일인지 다시금 실감한다. 러닝 코치가 한 말과 뉴욕에서 달리는 일이 전보다 어떻게 더 나은지 생각해보며 멈추지 않는다.


 틈틈이 다른 러너들도 보인다. 대개 나보다 아득히 빠른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달린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해왔기에 저렇게 잘 달릴 수 있을지, 그들 안에 흐르고 있는 본인만의 페이스가 얼마나 견고할지, 또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는 어떨지 상상해 본다. 더 나아지는 달리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을 것이다. 나는 그 꾸준함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동경의 눈빛을 그들에게 보내게 된다.


 이어폰에서 5km를 넘겼다는 안내 메세지가 흘러나온다. 문득 온몸에 고양감과 상쾌함이 흐르는 걸 느낀다. 마치 내 몸의 질량 일부분이 상쾌함으로 치환된 듯 몸이 가볍게 느껴진다. 침대에서 느껴졌던 가벼움과는 또 다르다. 이건 내가 직접 만들어낸 가벼움이니까. 이 힘으로 뉴욕에서의 첫날에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만족스럽게 달리는 걸 멈춘다. 나이키 러닝 앱을 켜고 운동 정지 버튼을 지그시 누른다. ‘운동을 정지합니다.’ 안내메세지가 들린다. 숨을 크게 들이 마신다. 더이상 뉴욕의 공기가 낯설지 않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구글맵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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