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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 Apr 19. 2024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직장을 떠올렸다

선박기관사가 미술을 좋아하는 이유

(이 글은 3월 3일부터 4월 12일까지 연재한 ‘뉴욕에서 보낸 편지’ 두 번째 이야기를 다듬은 글입니다.)

 

 눈을 뜨자마자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색 실크 커튼에 채도 낮은 햇볕이 스며들어 푸르스름해 보였다. 아직 새벽인가? 시계를 보니 여덟 시 반이다. 브루클린의 햇볕은 원래 이런가 싶다가 아차 싶어 일기예보를 확인했다. 오후부터 쭉 비가 온단다. 가벼운 탄식을 내뱉고 서둘러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분명 며칠 전에 일기예보를 확인했을 때만 해도 내가 뉴욕에서 머무는 기간 동안에 비 소식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집에서 비에 관한 무엇도 챙겨오지 않았다. 우산도, 비옷도. 커튼을 거둬보니 정말로 건물 사이 여백이 비구름으로 칠해져 있었다. 어제보다 주변 건물이 짙어 보이기도 했다.


 창문을 살짝 열었다. 아침 공기의 차가움은 가라앉아 맨 발을 간질였고, 축축함과 습함은 떠올라 들이마실 수 있었다. 짙어진 브루클린의 향기. 배에서 일을 할 때에도 이런 감각을 느끼곤 했다. 신기하게도 갑판에서 작업하려고 했던 날마다 자주 그랬다.


 배를 타는 일을 하다 보면 날씨에 민감해진다. 배를 운전하며 매일 여덟 시간씩 바다와 하늘을 보고 있어야 하는 항해사들만큼은 아니지만 나 같은 기관사도 날씨에 민감해져야 한다. 배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기관사들은 그렇게 얘기했다. 날씨에 따라 할 수 있는 작업이 달라지니까. 오늘은 비가 올 것 같으니 갑판 작업은 내일로 미루고, 대신 해수펌프의 모터를 정비한다거나, 뭐 그런 식이다. 일을 능숙하게 해내는 기관사일수록 머릿속에 날씨별로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서류함처럼 정리되어 있는 것 같다.


 아침 달리기와 샤워를 마친 뒤, 어제 먹다 남은 포케 반 그릇을 먹으며 생각했다. 비가 오는 한낮의 뉴욕에서 가장 멋지게 시간을 보내려면 미술관이 제격 아닐까? 묘하게 설렜다. 수많은 예술가와 작품이 모여드는 도시이기에, 그런 도시가 품은 미술관이기에. 어쩌면 그냥 카페에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별다른 노력 없이, 그러니까 마음에 드는 카페와 맛집을 물색하려는 노력 없이, 미술관의 유명세에 기대어 여행자의 감정을 만끽하고 싶었다.


 미술관에는 미술관만의 자유로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미술관에는 바라만 봐도 기분 좋은 것들이 보기 좋게 전시되어 있다. 심지어 관람 시간이 허용하는 선에선 마음껏 바라보아도 되는 점이 매력적이다. 물론 예술작품만큼 길가에 핀 민들레도 좋아한다. 그러나 민들레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괜스레 이상한 사람이라는 누명을 쓰기 쉽다. 반면 미술작품은? 하루 종일 바라본다고 해서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네 번째 뉴욕 여행이지만 아직 가보지 못한 미술관이 몇 군데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건 휘트니 미술관과 구겐하임 미술관. 망설임 없이 오늘은 구겐하임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름이 마음에 들었거든.


 평일 오후라 현장에서 표를 구입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다. 매표소 직원은 내게 영수증을 먼저 건넸다. 아니, 알고 보니 그게 티켓이었다. 그는 현재 미술관에서 두 가지 전시가 진행 중이며 하나는 현대미술, 다른 하나는 명화 전시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즐거운 전시를 바란다며 가벼운 미소를 보냈다.


 입장하려고 하자, 안내원이 티켓을 요구했다. 그는 내 티켓에 펀칭을 뚫고 전시 재밌게 보라며 미소를 건넸다. 이 미술관에선 말의 온점 대신 미소를 찍는 게 유행인가 보다. 티켓에는 하트 모양 구멍이 남아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더욱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티켓 확인하는 소소한 행동에도 사랑을 담을 수 있구나. 이곳이 점점 더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독특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외관상 위로 갈수록 조금 넓어지는 원기둥 혹은 원뿔의 뾰족한 부분을 땅에 꽂은 모양이었다. 어쩐지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종이컵이 떠오르기도 했다. 가운데가 텅 비어있고 나선형의 비탈길이 둘레를 따라 1층부터 최상층까지 이어져 있었다. 관람객은 비탈길을 따라 최상층까지 올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모든 전시를 볼 수 있게끔 되어있었다. 꼭대기에서 일 층 홀을 내려다보았을 때 부산 센텀시티 신세계 백화점이 떠올랐다. 여기에 에스컬레이터까지 설치되어 있었다면 신선함과 여행의 흥분이 확 식어버렸을 거다.


 구겐하임을 만끽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내 시선을 사로잡곤 도저히 놔줄 생각이 없는 그림을 만났다. 고흐의 <Mountains at St. Remy>였다. 보면 볼수록 묘한 기분이 드는 그림이었다. 이 그림이 왜 좋은지 고민하면 할수록 새로운 이유가 튀어나왔다. 처음 보았을 때, 가까이서 볼 때, 멀리서 볼 때, 오래 보았을 때, 부연 설명을 읽고 다시 그림을 바라보았을 때, 제각기 다른 이유로 좋았다.


 그림에 대한 호감은 단순히 색감이 마음에 들었다는 점에서 시작됐다. 그림을 바라보면 볼수록 푸르름과 흙 내음이 그리워졌다.


 바다 위에서 오랜 시간 보내다 보면 산과 들이 그리워지는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 그냥 보고 싶다는 감각이 아니다. 분이 풀릴 때까지 시야에 한가득 푸르름을 가득 채우고 싶은 마음, 숨을 크게 들이쉬어 흙 내음을 받아들이고 허파 속 소금기를 빼내고 싶은 마음. 바다에 오래 있다 보면 그렇게 구체적으로 육지를 그리워하게 된다. 근처에 섬이 보인다는 항해사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갑판으로 뛰쳐나가곤 했다. 그리곤 섬이 점처럼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봤다. 바닷냄새를 허파 끝까지 채우고 그 속에 섬에서 온 흙 내음이 섞여 있진 않은지, 찬찬히 훑어보며 들이마신 다음 바닷냄새만 내뱉으려고 한다. 그렇게라도 해야 속이 풀린다는 점에서 그건 허기에 가까운 감각일지도 모른다. 푸르른 허기. 나는 푸르른 허기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배에서 내린 지 3주밖에 되질 않았는데 마치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가 이 그림을 보면서 떠올려버렸다. 이 그림을 오래 보고 있으면 바다에서 채우고 싶었던 푸르른 허기를 채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시간을 통해 앞으로의 바다에서 느낄 허기도 미리 달랠 수 있기를 바랐다.


 가까이서 보니 그림에 직선이 거의 없다. 그림 속 산길이 거의 유일하게 직선으로 그려졌고 곡선으로만 그려졌다. 단순히 휘어지는 곡선이 아니라 굽이치는 곡선이다. 산을 보고 있지만 파도가 일렁이는 걸 보는 감각이다. 어쩐지 시원한 여름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나무가 연상된다. 멀리서 보니 흔들리는 나무들이 바람을 타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산이 살아있으며 거대한 피부에 둘러싸여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그림 속 산의 곡선을 산의 살결, 산결이라 부르고 싶다.


 중앙 아래에 들꽃이 보인다. 길가에 핀 들꽃인데 주변 나무들만큼이나 크게 그려졌다. 그림 속 유일하게 원근법에서 벗어난 피사체다. 가냘픈 선으로 그려진 덕에 그림에 적응하지 못하고 툭 삐져나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수 백예린의 <지켜줄게>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래처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떠올랐다. 어쩌면 백예린도 고흐도 길가에 핀 들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자유로움이 주어진다면 기꺼이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들. - 어쩌면 그들 스스로 이미 자유로운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 갑자기 그들이 귀엽게 느껴졌다. 흙길에 누워 한참 동안 들꽃과 눈을 맞추고 있는 고흐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가 정말로 그렇게까지 들꽃을 바라보며 그렸는진 알 수 없지만 예전보다 덜 눈치 보며, 길가의 민들레 앞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림 앞 기둥에 어깨를 기대어 한참이고 그림을 곱씹어 보았다. 지금 당장 구겐하임에 불이 나서 그림 한 점만 들고 나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이 그림을 들고 도망칠 테다. 그런 터무니없는 상상도 해보았다. 상상의 엉뚱함을 자각하자, 햇살이 쏟아지는 아침을 맞이하는 것처럼 다시 구겐하임이 보였다. 시계를 보니 벌써 세 시 반이다. 그 사이에 투명 비닐봉지를 씌운 우산이 미술관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관객들이 걸어 다니며 내는 비닐의 바스락거림이 마치 비가 내리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렸다. 발이 더 간지러워지고 눅눅한 미술관 바닥 냄새가 들숨에 섞여 들어왔다. 카페에서 글을 쓰는 대신 이른 저녁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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