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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감미 Aug 25. 2021

학보사 기자의 제주도 취재일기

난민을 단 한 명도 만나보지 않고, 난민에 대해 얘기 한다고?

20210506-07


약 3시간 만에 제주행을 결심했다. 누가 뭐래도 이번 기사는 내게 의미가 컸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학교 도서관 1층 책상에 혼자 앉아서 노트북을 하고 있던 때였다. 어쩌다 뉴스를 봤고, 어쩌다 시리아 난민 아기의 죽음을 봤다. 평소에 원채 분노가 많았는데, 그 기사를 보고 정말 눈이 뒤집혔다. 그리고 바로 국제 사회의 진상을 알리는 PD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솔직히 비웃음 살 수도 있는 이야기이지만 한 영화 속, 한 대사가 굳건히 지켜져 오던 내 결심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언론이 아무리 떠들어도 TV를 보던 사람들은 그냥 안타까워만 할 뿐 먹던 저녁밥을 마저 먹을 것이라는 대사. 쌓여있던 뭔가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동안 국제 정치와 난민 문제에 대해 혼자 공부하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을 쏟아부었던 시간들 전체가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과로 전향했다.


어찌보면 드라마 흉내를 내는 에피소드같지만 진짜였다. 그렇게 나는 공대에 진학했다. 솔직히 말하면 공대 2년 동안 사회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공대여서가 아니라 그냥 대학교에 들어오니 노느라 바빴던 것 같다. 뉴스도 챙겨보지 않았고, 콩알만큼의 시사 지식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휴학을 했다. 공허한 마음이었다.


1년이 지나 나는 학보사 기자가 됐다. 결국 마음이 이끄는 대로 언론계열로 오게 된 것이 우스웠다. 학보사에 들어와 부서별 교육도 받고, 표기지침도 외우고, 짧은 기획안도 써보는 등 수습기자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이번에 창간 개교 특집으로 1530호 기사부터는 모든 수습기자들이 참여했다. 녹취를 풀고, 인트로만 쓰는 등 기사 보조만 하다가 진짜로 기사를 쓸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기획 회의 때 여러개의 후보들 중 투표를 했는데 내 아이템이 두 개가 선정되었다. 하나가 '세계의 둘레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 난민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기사였다.


돌고 돌아 다시 여기로 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결국 내가 난민에 대한 기사를 쓰는 자리로 오게 되었구나 라는 생각. 사람들 모두가 보는 기성 언론도 아닌 학보사 기사였지만 공식적으로 내가 난민 문제를 이야기 하는 언론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회가 남달랐다. 그런데 일주일 뒤 문득 발견한 내 자신은 학교 노천 카페에 앉아 서면 인터뷰 요청 메일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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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을 단 한 명도 만나보지 않고, 난민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고? 가소로웠다. 그리고 더운 여름 뜨거운 열을 내던 도서관에서의 내가 생각하던 건 이게 아니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피부로 느끼며 생생히 취재한 것을 끄집어 내는 것이었다. 한 명이라도 만나봐야겠다는 일념으로 여기저기 수소문을 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고, 만날 수 있을 지 없을 지 불확실한 곳들에 전화를 돌려야 할 상황이었다. 시간이 너무 없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혹시 주변에 난민인 지인이 있는 사람은 연락 달라는 내 인스타 스토리에 '멋진 일을 하고 있구나'라는 답장이었다. 이번 주 내내 혼자 제주도를 여행 중이라는 친구의 말에, 지난 2월 나홀로 여행을 하며 난민이 일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곳이었다. 제주도에 가야겠다.


정말 아다리가 딱딱 맞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 식당에 전화를 걸었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전화를 받고, 다시 전달받은 곳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달력에 적어둘테니 오라는 답변을 받았다. 오후 2시. 인터뷰 일정을 잡아버리고 바로 목-금 왕복으로 제주도 비행기표를 끊었다. 친구가 마침 목요일에 서귀포에서 제주시로 올라오는 일정이라길래 같은 숙소를 잡으려 하니, 2인실 예약을 했는 데 자기는 혼자라면서 그냥 숙소를 같이 쓰자고 했다. 이 정도로 운명같은 우연이 있나 싶었다.


수요일 밤 짐을 싸고 인터뷰 질문지를 정리하는데, 갑자기 답답하고 너무 긴장이 됐다. 잘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가장 컸고, 거기까지 갔는데 인터뷰를 잘 못하면 어떡하지 라는 부담감이 점점 커졌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걱정과 잘하고 싶은 욕심 등 복잡한 생각이 덮치자 뇌가 넉다운 되어버렸다. 아무생각 없이 난민에 대해 조사한 자료들을 인쇄하다가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혼자 결심하고 혼자 생각이 많아지고 혼자 기사에 너무 의미부여를 해버린 내 자신이 오바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부끄러운 와중에도 누군가의 응원이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친구는 나에게 만약 제주도에 갈지말지 고민만 하고 실천하지 않았다면 후회하는 마음이 더 컸을 것이고, 처음 하는 일인데 갑자기 여러 가지가 동시에 닥치니 많이 부담스러웠겠다며 위로와 공감, 응원을 해줬다. 두 마디도 아니었다. 한 마디만에 엄청난 힘을 얻었다.


다음 날 10시 20분. 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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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고 인터뷰 일정을 잡은 식당 주변 카페에서 남는 시간 동안 인터뷰 질문지를 정리했다.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보고 난민에 관한 여러 뉴스들을 훑었다. 인터뷰 하시는 분이 만든 음식을 직접 먹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싶어 30분 정도 일찍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고 나서 인터뷰 전화 드렸던 학생이라고 소개하자, 반갑게 맞아주셨다. 밥을 다 먹고, 조금 기다리고 있었는데 2시 즈음 손님이 두 팀이나 왔다. 뻘줌하게 빈그릇과 함께 기다리고 있으니 부엌에서 셰프가 나오셨다. 예멘에서 오신 분이었다.


여태껏 걱정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엄청난 당혹감이 머리를 강타했다. 영어..! 영어를 써야했다. 너무 아무생각없이 당연히 한국어를 잘 하실거라고 생각한 내가 정말 바보였다. 떠듬떠듬 영어 단어를 뱉어가며 말하다가 너무 답답해서 레스토랑을 함께 운영하시는 셰프의 아내분(한국인)께 통역을 부탁드렸다. 부끄러웠다. 영어 인터뷰지를 만들지 않은 내 불찰이었다. 어쨌든 아내분 덕분에 무사히 인터뷰를 마쳤다.


학보사에서 기사를 쓸 땐 먼저 기획안을 만든다. 기획의도와 기획방향을 쓰고 대충 틀을 짜놓는데, 때문에 기획안에서는 인터뷰가 들어갈 곳이 어느정도 '답정너'인 부분이 있다. 이런 답변이 나오겠지 하고 예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레스토랑에서 내가 들은 답변은 예상과 완전히 벗어난 부분들이 많았다. 전혀 몰랐던 것도 알게 되었고, 난민 분들의 삶 또한 당연하게도 내 삶처럼 입체적이라는 게 확 와닿았다. 무엇보다, 아내와 나란히 앉아있는 셰프의 얼굴엔 행복이 가득했다. 기획안을 쓸 당시 겨울 느낌의 레이아웃을 짰던 과거의 내가 잠시 스쳤다.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금요일 낮, 바로 다음 인터뷰 일정이 있었다. 난민 구호 단체를 만드신 시리아 분의 인터뷰였다. 사실 이 분은 유학생 신분일 때 한국으로 왔지만 본국 상황 때문에 돌아가지 못해 난민이 되신 분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상황을 알지 못하고 유학생인데 난민 구호단체를 만드신 분으로서 인터뷰 요청을 드렸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하면서 이 분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귀화하게 된 난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찍 도착한 카페에서 자료들을 거듭 읽어보며 기다렸다. 시간이 다되자 인터뷰이분이 오셨다. 라마단 기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앞서 예멘 난민 분 인터뷰를 해서 그런지 낯선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인터뷰를 시작하고 나서 그분이 말씀하시는 걸 듣고 있는데, 몇 번이나 생경하면서도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이게 바로 인터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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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활자로는 온전히 전할 수 없으리라. "실제로 보고 듣고 느낀 것"과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글, 영상"과의 생생함의 간극을 좁히는 일. 그것이 언론인의 숙제가 아닐까 생각했다. 난민 분들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하는데, 폭격과 연기로 가득찬 먼 땅으로부터 몇 만 km를 건너오며 겪어왔을 한 사람의 온 역사가 내 앞에 빛나는 눈동자로 살아있다는 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너무나도 같은 사람이었다. 눈가가 조금 더 깊고, 코가 조금 더 오똑하고, 피부가 조금 더 짙은, 나와 같은 사람. '난민'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땐, 난민의 삶, 난민을 위한 정책, 난민의 역사 등 추상적인 무언가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 안에 속속히 살아있는 개개인의 '존재'를 느끼긴 어렵다. 우리 앞에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 이상.


이 '온전한 모습'은 어떻게 생길까. 앞서 인터뷰했던 시리아에서 오신 분(지금은 귀화해 한국인)이 하셨던 말씀이 또렷이 기억난다. "먹고 자는 것만이 인간의 삶이 아니에요. 법적으로도 인간으로서 기본 권리를 인정해줘야 난민들도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어요."


근 며칠 간 나는 법이 웃기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얼마나 막무가내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어찌 법은 또 지키며 살아간다. 그 보이지 않는 강제성이 참 묘하고 신기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법'때문에 누군가는 실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 되어버린다는게 얼마나 끔찍하게 느껴지던지.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세계'의 둘레를 정해놓고 누군가를 내치는 꼴을 참을 수 없어 취재하기로 결심했지만, 취재 내내 정말로 뜨겁게 살아있는 사람들을 가까이 보면서 한편으로는 부끄러워졌다. 내가 이들을 '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들을 '논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숨쉬며 살아있는 너와 나였음을, 두 눈을 맞추고 얘기하고 나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뉴스아님 #제주도취재일기 #20210510



취재하고 썼던 기사 : http://www.hy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1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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