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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a Sep 25. 2019

취향이 뭔가요

저도 모르지만 일단 써봅니다

(사진 크레딧: Dick van Duijn)


나뿐일까, 취향이란 말이 언젠가부터 조금 변질됐다고 느끼는 사람이.


몇 년 전, 유달리 취향이라는 말을 입에 자주 올리던 지인이 있었다. 성별은 쓰고 싶지 않았지만, 한국 사회에서의 고정된 성역할을 이해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 사람이 남자였다는 사실이 배경 이해에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굳이 밝힌다. 우리 모두는 20대 중반이었고 (=돈이 별로 없었고) 특히나 그는 동년배 남자들 중에 감수성을 나누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같이 보여줄 이가 없어 경험에 늘 목말라 있었다. 그러던 그가 언제부터인가 부쩍 취향과 안목에 대한 다양한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얘기하는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은 사실 본인이 보고 만지고 먹어본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문장이 hearsay였다.

“ㅇㅇㅇ에 디저트가 맛있대”

“비 오는 날엔 ㅁㅁㅁ을 들어야 한대”

“프랑스/북유럽에서는 xxx가 인기가 많은데,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이래”


누가 좋다더라 하면 솔깃해서 to-do list에 넣게 되는 그런 입소문과의 입담과는 달랐다. 나는 그를 꽤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본인이 취향처럼 전시하는 물건/장소/무형의 자산을 실제로 소비하는 것을 본 적이 별로 없다. 책만이 예외였다. 그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느껴지는 마음속 한 구석의 불편함이 뭘까 늘 궁금했다. 돈이 꼭 있어야만 취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금전의 부재가 동경으로 치환된 쓸쓸한 현실이었으려니 하고 잊고 살았다.


요즘 수필을 읽고 있다. 취향이 멋지다며 누군가 추천했던 책이었다. 작가는 강박적일 정도로 개인 공간에 정성을 다하고, 고풍스럽고 전통 있는 브랜드의 옷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그릇이며 침대보까지 취향 전시를 한다. 본인 피셜 돈을 무척이나 쓰는데도 너무*100 촌스럽다. 그러자 옛날의 그 풍문 (hearsay) 취향의 그가 겹쳐졌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생각에 빠졌다.




돈을 쓰지 않아서, 경험의 폭이 좁아서 그들의 취향이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들이 좋아하는 물건이, 그들이 소중히 하는 루틴이 정작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지 못해 그토록 공허하게 들렸던 것이었다. 전자의 예는 ‘남들의 판단’이 그 기준이었고, 후자의 경우는 본인 취향의 근거지로 삼는 것들이 어릴 때부터 본 미국 home movies들과 유럽 귀족의 라이프스타일이었다. (솔루션의 타깃은 스튜디오 사이즈의 1인 가구이지만 본인의 로망은 미국 중산층의 널찍하고 풍요로운 주택에서 나왔다고 거듭 말한다.)


저 모든 것들이 출발점일 수는 있다. 욕망은 필요가 아니라 동경에서 많이들 출발하니까. 그런데 그들이 갖고 있는 물건이 본인들을 대변해주지 않는 순간 그들이 그렇게 만들고 싶어 했던 ‘취향 알레고리’는 힘을 잃었다. 요즘 같은 소비사회일수록 더욱, 이건 로망이고 이걸 갖고 있으면 질 좋은 물건이니 좋고 라는 얘기는 더 이상 취향으로 이어지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어떤 물건을 봤을 때, ‘아 이 사람 거야’

혹은 그 사람을 봤을 때, ‘여기/이것/그 일에 어울리는 사람이잖아!’라는 느낌이 들 때가 참 좋다. 일단 확고한 그 사람만의 이미지와 개성이 있다는 뜻이고, 저 판단이 오랜 시간 함께한 데서 비롯했다면 주위 사람들에게 충분히 전해진 그의 취.향.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게 취향이라고 생각한다.


면대면으로 알 수 없는 사람이라면 글 얘기로 돌릴 수 있다. 조금 읽었을 때, 아 이 작가는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그림이 바로 나오면 잘 쓴 에세이라고 생각한다. 그 기저에는 글투에서나 관심을 갖는 물건이나 단어 선택에 그 작가의 분명한 취.향.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읽어도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안 나오는데 취향이며 고급품 얘기를 한 바가지 퍼붓는다고 없던 게 생기진 않았다.


지금 개성이 뚜렷한 이들도 처음부터 그런 모습이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지금 모습은 오랫동안 지켜온 방향성과 끊임없이 단련한 중심잡기의 결과일 테다.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들의 취향이 보이고, 초점이 다른 곳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취향이란 가공의 알레고리로 남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자기피알의다양한수단을질타하고싶은생각은없습니다

#전취향말고싫어하는것만가득한사람이지만저를대변할수있는뭔가가있다면앞으로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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