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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연 Aug 03. 2022

부동의 순수란

나쓰메 소세키, <도련님>

2022.08.03 (화)


조금 은밀한 독서모임 5회가 끝났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마음속에 어떤 기준들을 품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도련님> 속 주인공은 자신이 생각하는 옳고 그름이 꽤나 명확했습니다. 이러한 확고한 시선과 행동들 때문인지, 도련님의 존재는 새로운 시골 학교에 녹아들기 쉽지 않습니다.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그는 본인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던 기요를 떠올립니다. 기요라면 이렇게 했을 텐데, 기요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도련님의 대쪽 같은 성품과 가치관들은 어렸을 때부터 거의 순수성에 가깝게 유지됩니다. 그러나 현실을 맞닥뜨린 그의 순수는, 어찌 보면 직선적인 것을 넘어서서, 융통성이 없고 획일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는 '단순함이나 진솔함이 비웃음을 사는 세상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며 타협을 거부하죠. 이는 제한적인 소통을 유발하고, 나아가 근대사회 형태에의 적응을 막는 요소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결국 새로운 세상도 그의 방식을 수용하지 못하고, 그도 그 세상을 등지면서 도련님은 자신의 순수가 통하던 기요(淸)의 품으로 회귀하게 됩니다.


이런 도련님이 한 마디로 대쪽 같다면, 우리 자신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사실 소설 속 도련님처럼 절대선을 명확하게 따져가며 행동하기란 쉽지 않잖아요. 성인군자도 아니고, 솔직하게 욕심이나 이기에 의해서 행동하는 경우들도 생깁니다. 도련님 같이 일정한 선의 기준을 고집하는 사람은 오히려 거부감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또 이유 없는 타인의 행동과 변수들은 납득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아마 우리 모두, 마음의 순수와 현실의 타협을 각자의 방식대로 조절해나가며 살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초의 신념과 순수로 회귀하는 결말보다는, 현실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요. 그러기 위해서 때로 속마음과 행동을 분리해서, 조직의 모난 돌이 되지 않기 위한 처세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저 모든 이들이 이렇게 양면적인 것들을 동시에 품고 고민한다는 점을 알면, 서로를 더 이해하고 납득하는 바탕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와는 너무 다른 그 사람의 행동의 바탕이 된 생각은, 아마 여러 가치관과 상황 사이의 조정 과정을 거쳐서 나온 무언가겠죠. 물론 그건 솔직한 대화로만 알아낼 수 있겠지만.


나는 도련님과 다른 사람이라고 단정해도, 세상에 잘 녹아들고 있다고 생각해도. 나도 모르게 가끔 세상에 등지는 듯한 순간들이 있을 겁니다. 내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은 분명 이게 아닌데. 사람은 좋고 싫은 감정으로 움직이는 법이지, 논리로 움직이는 게 아닐 때도 많으니까요. 그럴 때는 역으로 도련님이 자신의 주관을 거칠게 밀고 나가는 그 치기가 떠오를 것 같습니다. 내 안에 부동의 순수가 있는 게, 융통성은 위협할지라도 종종 위안도 될 수 있거든요. 그것은 마치 부모와 같아서 나를 품어주는 어떤 내적인 뿌리이기도 합니다. 저도 그렇게 잃지 않는 가치들을 마음에 품고 있고 싶기도 합니다.


도련님을 어떻게 바라보든 간에, 자신의 신념과 행동에 믿음을 가지는 태도는 어느 정도 배우고 싶습니다. 다만 내 마음의 순수를 못 박거나, 반대로 잃기보다, 다양한 각을 띄게 가공한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책을 읽고 여러분과 대화하는 시간은 제 나름의 가공의 시간입니다. 앞으로도 그런 시간들을 계속 함께하길!


*위 글은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에서 발췌한 구절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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