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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디강 Cindy Kang May 09. 2022

5번가의 날아다니는 캔버스

쇼핑 스트릿에 미완성 학생 작품 휘날리며 걸어 다니기

            

내가 예상한 미대생은 지관통을 어깨에 메고 샤랄라 하는 예쁜 원피스를 입고 학교에 가는 거였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작고 소중한, 그리고 조금 허름한, 학교 기숙사에 살았던 나는 세 개 정도의 애비뉴를 지나서 학교로 걸어 다녔다. 캠퍼스가 없는 전형적인 뉴욕 시티의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바쁜 직장인들과 학생들 그리고 관광객들로 가득한 거리를 뚫고 매일을 걸어 다녀야 했다. 


첫 스튜디오 수업을 들은 날엔 교수님으로부터 아주 긴 준비물 리스트를 받았다. 알리자린 크림슨, 번트 엄버... 익숙하지 않은 색상으로 가득한 유화 물감 준비물 리스트를 받고 그걸 몽땅 사 와야 한다는 걸 들었을 때 조금 철렁했다. 포트폴리오도 몽땅 아크릴화로 준비했던 나에게 유화라니요. 가격에 충격받았지만 그래도 설레는 마음으로 친구들과 학교 근처에 있는 화방에 가서 숨 한 번 크게 쉬고 몽땅 장만했다. 엄빠 아빠 고마워요... 묵직한 비닐봉지가 찢어지려고 했다.


우리는 이 무거운 걸 수업을 위해 매번 들고 다녀야 하는 운명이었다. 학교의 지하에는 아주 작은 캐비닛이 있었는데, 선착순으로 배정이 되었다. 어이없어서 웃음 나오는 크기의 캐비닛은 너무나 작아서 도구 상자가 세로로 꽂혀 보관되어야 하는 공간이었다. 그래도 운 좋게 구석에 있는 캐비닛을 사용할 수 있게 되어서 마음이 편했다. 이 무거운 물감과 도구를 다 가지고 다닐 생각만으로도 어깨가 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캔버스가... 한두 개 정도는 학교 스튜디오에 있는 대형 캔버스 장에 두고 다닐 수 있었지만 그 외에 과제들이 문제였다. 스튜디오 수업이 있는 날엔 언제나 매고 있는 가방 외에도 손에 드는 캔버스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붐비는 공원, 셱쉑 버거, 5 애비뉴의 쇼핑 스트릿을 대형 캔버스와 함께 지나가야 했다. 간혹 가다 나의 (너무나 자신 없는) 작품을 보려는 사람들도 신경 쓰이지만 혹시나 덜 마른 유화 작업이 누군가에게 묻을까 걱정이 되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비닐봉지 같은 거로 싸고 다니려니 아직 안 마른 작품이 망가질까 걱정이 됐다. 


한참 넋이 어디에 달려 있는지 모르는 상태로 걸어가는데 마지막 붙들고 있는 넋을 놓아 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뉴욕은 바람이 참 많이 부는 곳이다. 높은 빌딩과 다른 빌딩 사이로 늘 바람길이 만들어져서 10년의 뉴욕살이로 생긴 내 철칙은 샤랄라 하게 퍼지는 공주 치마를 입지 않는 것이다. 내 마음을 알 길 없는 칼바람이 가차 없이 휙 불더니 내가 들고 있는 캔버스를 연으로 만들어버렸다. 묵직한 내 캔버스가 힘 없이 휙 90도로 펼쳐졌다. 머리카락도 날리고, 옷도 뒤집히고, 캔버스는 날개처럼 펼쳐지고, 아.....


그냥 그 순간 내 만신창이 같은 모습을 보고 너무 웃겼던 게 아직도 생각난다. 환상이 환상뿐인 건 다 이유가 있는 거구나 싶었다. 러블리하게 차려 입고 학교에 가는 미대생 이미지는 도대체 어디서 온 건지 알 수가 없다. 북적이는 거리에서 키만 한 캔버스가 뒤집히고 나니 아무 생각도 안 났다. 그냥 정신을 차려보니 만신창이 꼴로 학교에 도착해있었다. 그다지 사람들에게 관심 없는 뉴욕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쳐다봤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때의 창피함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림 신디강 from "Therapy Toolkit" / www.cindysykang.com




이게 첫 1학년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달려 나가고 싶은데 어설프고, 예쁘게 포장해보려고 해도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상태였던 나는, 다 알아서 하겠다는 믿음직한 표정을 하고는 늘 허둥지둥 대고 있었다.      


1학년 때는 진로 고민이고 뭐고 별생각 없이 학교와 새로운 친구들과 새로운 지역에 적응하기에 급했다. 모든 게 뚝딱거렸고 어려웠고 과하거나 부족했다. 같은 기숙사에 살았던 한국인 친구들과 포틀럭 파티 마냥 한 명은 김, 한 명은 밥, 한 명은 고추참치캔을 가져와서 저녁을 같이 먹고는 했다. 미국은 만 21세부터 술을 살 수 있기에 18살이 되던 생일에는 친구들이랑 삼겹살과 물의 조합으로 양심적인 파티를 했다. 새벽에 쓰레기차 소리를 들으면서 잠에 들었던 밤샘 과제를 여러 번 했지만 알고 보니 과제를 잘못 이해했거나 그렇게 코피 흘리며 할 필요는 없는 간단한 과제였다. 추수감사절 휴일에는 보스턴에서 친한 언니가 놀러 왔는데, 내가 지냈던 성냥갑만 한 기숙사의 성냥 머리만 한 침대에서 함께 뻣뻣하게 자다가 새벽에 언니가 침대에서 떨어졌다. 기숙사가 좁아 침대 밑에 짐을 둬야 해서 점프해서 올라가야 하는 높이의 침대였는데... 언니는 그날 멍이 크게 들었다고 한다. 








엉망진창인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재밌는 일도 많았다. 코네티컷이라는 잔잔한 곳에서 와서 그런지, 이게 진짜 대학 입학과 동시에 스무 살의 오춘기를 겪어서 그런지, 조금씩 힘들어지다 1학년이 끝날 때쯤 뉴욕이 버거워졌다. 긴 겨울이 끝나고 봄꽃 날리는 날 매디슨 파크에서 길거리 악사의 완벽한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나는 휴학을 결심하게 됐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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