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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디강 Cindy Kang Jan 03. 2020

불친절하면서 친절한 뉴욕

환상은 깨졌지만 계속 마음은 가네요.



지루했던 코네티컷 너드 생활을 끝내고 뉴욕으로 왔다. 고등학교 생활은 그저... 무한도전, 한국 드라마 스트리밍과 기숙사에서 같이 지낸 언니들과 저녁 먹으면서 웃긴 얘기를 하는 것뿐이었다. 주말마다 가는 동네에 있는 몰도 한두 번이 재밌지, 어느 순간부터는 ', 여기서 무슨 재미를 찾아야 하나'하는 생각만  뿐이었다.


고등학교 때 입시 준비를 하면서 깨달았지만 미대생은 그렇게 아름다운 자태를 가지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미디어의 폐해를 깨달은 건 거대한, 그리고 말려서 지관통에 절대 들어갈 리 없는 스케치북을 샀을 때였다. 뉴욕은 높은 건물들이 좁은 간격으로 따닥따닥 붙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바람길이 많다. 거대한 24인치짜리 스케치북을 사고 다빈치(뉴욕의 예림 문구, 한가람, 홍대 호미화방...)를 나오자마자 그 바람길에 바로 들어서면서 벌어지는 일은....


이미 기숙사로 들어올 때 스케치북은 바람을 하도 맞아서 너덜너덜하고, 신입생의 화사함을 위해 치마를 입고 나간 나는 바람에 날리는 치마를 붙잡느라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다. 한 달에 약 200만 원을 내고 사용하는 우리 학교의 유명한 신입생 기숙사는 엘리베이터가 6명이 들어가면 꽉 차고, 24인치 스케치북과 두 손 가득 이것저것 재료들을 들고 있는 신입생이 타면 5명 정도가 겨우 들어가는 사이즈였다. 엘리베이터는 내 기숙사 방 층에 도착해서 15초 정도 대기 후에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온 나는 바퀴벌레가 어디 숨어 있을지 모르니 조심조심 땅을 쳐다보며 안으로 들어가서 스케치북이 들어갈 자리를 겨우 마련하고 침대에 앉는다.






뉴욕 생활이 럭셔리하다는 건 개뻥 중의 개뻥이다. 뭐 이미 열심히 일을 해서 화려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아름다운 도시가 없을 것이다. 예쁘고 좋은 것들이 참 어찌나 잘 모여있는 도시인지, 가진 자에겐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곳이다. 하지만 '럭셔리'는 뉴욕을 설명하는 최적의 단어는 아니다. 물론 나도 부모님 덕에 감사히 뉴욕에 유학을 하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뉴욕 생활의 디폴트는 럭셔리가 아닌, 내는 만큼의 값을 하지 못하는, 마치 비행기 화장실 같은 숙소에서 이리저리 타협하며 지내는 생활이라는 것이다.




야, 그 정도면 살기 괜찮지.




뉴욕의 주거 형태에 익숙해진 내가 집을 보는 기준이 팍 낮아져 버렸다. 개인 공간이 있고, 계란 프라이할 수 있는 키치넷(kitchenette)이 있으면 살만한 집 아닌가? 뭐 세탁기 건조기 건물 안에 있고, 캐리어 넣어둘 공간 있고, 이사할 때 매트리스 옮길 수 있는 엘리베이터 있으면 좋긴 하겠다. 럭셔리하다, 얘.


부모님이 처음 뉴욕에 있는 나를 방문했을 때 많이 속상해하셨다. 이런 쪼가리 같은(?) 집에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내가 안쓰러웠나 보다. 열악하긴 했어도 나는 충분히 잘 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돈을 이따만큼 보내주는데도 작은 방에(집이 아니다.)서 스케치북과 공간을 나눠 살고 있는 내가 힘들어 보였던 것 같다.


SVA 1학년 때 지냈던 George Washington Residence. 너무 열악했었던 이유에선지 현재 Freehand Hotel로 바뀌었다.


맨해튼에 살면서 살만한 집을 기대한 건 나의 실수라는 것을 1년간 학교 기숙사에 살고 나서 알게 되었고, 그다음엔 헤이코리안 한인 부동산 사이트를 통해 룸메이트를 찾아서 집을 구했다. 맨해튼처럼 미친 듯이 말도 안 되는 비용보다 조금 덜 말도 안 되는 비용으로 맨해튼 밖의 괜찮은 집을 찾아서 들어갈 수 있다.


브로커를 통해서 집을 찾아서 계약해보기도 했고 룸메이트를 찾아서 살아보기도 했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헤이코리안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이다. 말 통하고 문화적 배경이 같은 한국인들과 있는 건 큰 안심이다. 아마 인생에서 집 구하는 것만큼 스트레스받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위경련에 불면증이 생길 정도로 고생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정말 정말 운 좋게도 매번 룸메이트들을 잘 만났고, 덕분에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코네티컷에서 매일 심심한 날들을 보내던 내가 반짝이는 눈으로 온 뉴욕은 사실 이런 곳이었다. 가끔 너무 힘들어서 다시 코네티컷으로 돌아가 나무를 보고, 사슴을 보고, 집에서 수제잼을 만들며, 마당의 돌에 그림 그리며 사는 삶을 꿈꾸기도 했다. 지낼 집 고민에 온갖 고생을 다 하게 되고, 매일을 너덜너덜 바람에 날아다니고, 조심해야 하는 옷(예쁜 옷)은 많이 입지 못했으며, 작은...좀 많이 작은 것에도 행복하게 됐다.






브루클린 덤보에 위치한 Main Street Park


대신 뭐, 그 때문에 좋은 영향도 있긴 했다. 나는 부지런해졌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더 많은 것들을 보고, 찾아다니게 됐다. 서울에 있을 때는 집에 있는 것만큼 좋은 게 없었는데, 생각해보니 집을 나갈 필요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집에 엄마 아빠가 있고, 티격태격 놀 오빠와 귀여워할 강아지가 있었고,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나를 부둥부둥 안아줄 존재들이 많았던 것이다.


반면, 뉴욕은 나를 마냥 예뻐하는 곳은 아니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곳이 아니라는 건 날 외롭게 하고 충격을 줬지만 어떻게 보면 나에게 필요한 충격이었던 것 같다. 쇼크를 줘서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것처럼, 불친절한 뉴욕은 많은 충격과 상처를 주며 온실 속 화초 같았던 나에게 알을 깨고 도전을 할 용기를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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