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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디강 Cindy Kang Feb 20. 2024

요즘 뉴욕, 비자, 사는 이야기

일러스트레이터 미국살이 마음 다잡기

얼마 전, 우연히 예전에 사용하던 겨우 수명이 붙어 있는 하드 디스크를 정리하다 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아주 극강의 정성을 들여 쓴 것 같아 보이는 '나에게 쓰는 편지'라는 제목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렇게나 간직하고 싶으니 사진까지 찍어둔 거겠지. 자타공인 기록쟁이에게 이런 순간은 피하기 어렵다. 과거의 나를 마주하는 것만큼 떨리고 재밌고 괴롭고 피하고 싶은 게 있을까. 보면 안 될 것을 보는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편지를 열어보고는 깊은숨을 쉬었다.


'뉴욕에 남게 해 주세요'라고 써놓은 글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세월이 그냥저냥 흘러가는 듯했는데,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는 그 시간 속 내 여러 노력이 느껴져서 기분이 요상해진다. 2023년 중순부터 새로운 세상에서의 목표를 갖느라 정신이 없었다. 왜 하필 이런 급성장을 앞둔 시기에 새로운 길을 개척했는지, 시행착오도 많고 외로운 날도 많았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가져오기에 내 브런치가 꿀단지 마냥 소중해서 글을 쓰지 못했는데, 그냥 어떤 생각으로 사는지 쓰면서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불면증, 비자

뉴욕에 있었던 시간을 포함해 미국살이가 올해로 15년 째다. 비자 신분으로 살아가는 건 정말 만만치 않다. 내 인생 통틀어 가장 정신적으로 안정적이고 행복했던 게 지난 2022년과 2023년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친구들, 둘은 비자 만료 기간까지 남은 넉넉한 시간이었다. 비자 만료가 1년 남은 시점인 2023년 말부터 다시 매일 밤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잠을 푹 잔 게 언젠지 잘 모르겠다. 자다가도 갑자기 일어나서 이메일을 체크했다. 이메일 올 리가 전혀 없는 시간이라, 새로고침을 해도 뭐 뜰 일이 전혀 없는데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만지작하는 거다. 무의식 중에 뭐를 기다리고 있던 걸까?


지금 가지고 있는 아티스트 비자는 수상이나 전시, 프레스 등 예술인으로서의 실력을 입증하고 발급받는 비자다.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해서 취득한 비자였는데, 그 기간 동안 어느 정도의 자존감을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다. 분명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증명 서류를 모아 발급받는 비자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대단하지 않은 지 깨닫게 되는 험난하고 또 험난한 여정이었다. 계속해서 나의 객관적인 실력과 능력을 따져야 하고, 그걸 사람들과 공유해야 하고, 추천서를 부탁하고, 내 편이 되어줄 거니? 하고 물어봐야 하는 날들. 걱정하고 고민하느라 몸과 마음의 힘이 다 빠져버렸다.


물론 좋은 결과에 다시 살아나고, 시간이 또 약이 되어 잘 회복했다. 뉴욕에 돌아와서는 얼마나 꿈을 펼친답시고 열정적으로 살았는지... 2년의 행복한 세월 후 다시 고민의 늪으로 돌아가야 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팠다. 쉼과 충전의 날들에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깨달았다. 벌써 또 시간이 흘러 흘러, 다시 그걸 준비할 때가 왔다는 거다.



성공이 뭘까?

예전부터 내 인생 목표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요즘 조금 추가된 건 동화 속에 묻혀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 내 커리어든 라이프 스타일이든 말이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잘난 사람으로 살거나 거대한 저택에 살 생각은 전혀 없고, 그냥 가진 것과 얻은 것에 감사하며 사는 삶을 살고 싶다. 외로움과 싸워가며 큰돈을 쓰고는 화려한 (혹은 비싼) 뉴욕까지 와 있으면서 소박한 행복을 목표로 삼다니. 뭔가 어울리지 않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뉴욕은 야망뿐이 아니라 이런 걸 목표로 가지게 하는 곳인 걸 알게 됐다. 어딘가 시대에 역행하는 느낌이 들어도 이런 게 나인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뉴욕. 성공과 행복을 위한 뉴욕. 그런데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뉴욕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을 하면서 어떤 프로젝트든, 좋은 기회가 찾아오든 간에 나는 '비자에 도움 되나?'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현실적으로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미국 뉴욕에 체류할 수 있는 비자는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신경을 끄고 살 수 없었다. 100% 확신이 서지 않더라도 일단 리스트에 추가하고 맡게 되는 일들 - 비자를 위한 일들이다. 그렇지만 도장 깨기 형식의 스펙 쌓기는 좋을 수가 없다. 결과에만 집중하는 습관이 생겨서, 어떤 기회가 주어지든 간에 문턱을 넘자마자 그 기회를 잡은 물고기처럼 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질보다 양 식의 스펙 쌓기에만 혈안이 되어있다면, 특히 아티스트에겐, 아주 먼 길을 되돌아와야 하는 커리어 여정이 될 수 있다.


눈앞의 목표인 비자를 위해서 경주마처럼 달리다 보니 내가 딱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길로 들고 있을 때가 있다. 비자를 얻기 위해 나에게 베스트가 아닌 (등쳐먹는)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이 들거나, 돈이든 시간이든 무리가 되는 (등쳐먹는) 작업을 해야 하거나 할 때, 마음이 불안해진다. 조율을 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을 때 무력감이 몰려오며 하염없이 작아진다. 여러 일들을 무리해서 했고 비자에 도움도 됐지만, 내 아티스트로서의 성장에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는 것들이 많다. 


뉴욕에 가야 하는데, 그러면 비자가 중요하네.

그치만 비자를 받으려면, 아티스트로서 성취가 중요하네.

아티스트로 성취가... 비자를 받을 때 증명한 것들과 같진 않네.

비자에 사용한 증명들이 쭉정이를 뺀 아티스트로서의 성취로만 가득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뭘까?


물론 초년생을 벗어나 이젠 퀄리티 컨트롤을 눈에 불을 켜고 하고 있지만 장기전으로 여기며 버텨야 하는 현실 생각에 마음이 지글지글할 때가 찾아오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결국엔 작업 또 작업

뉴욕에서 살려면 네트워킹을 잘해야 한다, 한국인과 거리를 두고 외국인들과만 지내라, 자신감으로 무장한 태도를 가져라, 목소리를 내라 - 뉴욕살이 성공 방법에 대한 말이 많다. 아티스트, 디자이너 세계에서도 네트워킹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비자와 커리어 등 많은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그냥 좋은 작업을 해라, 이뿐이다. 


Make Good Art by Neil Gaiman. 책 닐 게이먼을 만든 생각 중에서.


비자에 사용한 증명들이 영양 넘치는 알맹이, 작가로서 만족스러운 성취로만 가득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시간이다. 하지만 비자는 체류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시간에 있어서 자유롭지 않다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이다. 준비 기간과 '이때까진 꼭 받아야 함'이 반드시 있기 때문에 더 머리가 아프다. 시간만 더 있으면 쳐낼 건 쳐내고, 후회 없을 것 같은 일, 만족스러운 일만 하고, 더 진정성 있는 작업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런 게 현실인 건가 싶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제일 치사하고 싫지만, 어느 정도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하나 싶다. (쓰면서도 스트레스받는다.) 배고플 때 마트 가면 안 된다고 했다. 시식으로만 배 채워서 제대로 된 저녁은 못 먹는다며. 허기만 달래는 시식코너의 십시일반 끼니가 아니라 영양을 생각한 제대로 된 한 끼를 먹어야 건강한 몸을 갖게 된다. 건강한 몸이 있어야 계속해서 일하고, 놀고, 먹고, 그림 그리고, 여행 가고....


답답한 현실을 받아들인 게 가치가 있으려면 그만큼 남들이 말하는 비현실=내 꿈=내 목표에 대한 것에 힘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들의 의견이나 그에 따른 타협 없이 정확하게 내가 원하는 것, 그것을 생각하고 달려야겠다. 비자가 어떻든 저떻든, 쭉정이든 아니든, 어차피 정해진 일이니 앞으로 고민할 시간에 좋은 작업을 하는 데에 집중하자. 우선순위는 1번도 좋은 작업, 2번도 좋은 작업을 하는 것이고, 내가 이걸 목표하는 데 집중한 만큼 다른 성취들이 따라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제 좀 생각정리를 했으니 복잡한 건 옆으로 슥 밀어 두고 작업에 집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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