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교실에 오세요 10
고물 휴대폰 찾은 날, 2학년
어제 고물 휴대폰을 찾았다. 예전에 터질 뻔해서 너무 놀랐다. 휴대폰을 찾아서 기분이 좋았는데 예전에 터질 뻔했던 그 휴대폰이다. 그런데 전원을 켰더니 안 터졌다. 그래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마인크래프트 게임을 조금 했다. 게임을 하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다음에는 내 휴대폰 최신 버전을 사면 좋겠다.
영어 학원에 새로운 친구 온 날, 2학년
어제 영어 학원에 새로운 친구가 왔다. 전에 같은 반이었던 친구였다. 또 한 명의 새로운 친구가 오니 영어 학원 빙고 게임할 때 더 재미있어졌다. 빙고 게임을 또 했는데 또 내가 이겼다. 내가 또 이겨서 정말 기분이 좋았다. 빙고 게임을 하고 영어 문제를 맞히는 문제였다. 다 끝나고 검사를 받았는데 모두 다 100점이어서 너무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또 문제를 맞혔다. 이번에는 1개 틀려서 너무 아쉬웠다. (중략) 그다음은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다. (중략) 다음 수업도 계속 계속 100점을 맞으면 나중에 어른 되어서 외국 갔을 때 영어를 엄청 잘하겠다. 꼭 그렇게 되었으면 정말정말로 좋겠다. 너무너무 좋겠다.
고물 휴대폰을 찾았다. 게임을 조금 했더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새로운 친구가 와서 빙고 게임이 재미있어졌다. 문제를 맞혀서 기분이 좋고 영어를 잘하게 된다면 정말정말 좋겠다, 너무너무 좋겠다고 썼다. 곱슬곱슬 파마머리에 동그란 눈이 커다란 2학년 친구의 귀여운 글이다. 그런데 여러 번 반복해 등장하는 단어가 보인다.
“얘들아, 우리가 글에서 자주 쓰는 말이 뭘까?”
‘나는’이요. ‘오늘’이요. 그래, 그것도 그러네. 동생 일기를 봤다고 생각해 봐. 이 말은 꼭 있다, 어떤 말일까. 아이들이 금세 찾아낸 답은 ‘재미있다’, ‘신난다’, ‘또 하고 싶다’, 아이들 글쓰기 단골 단어다. 이런 단어들은 편하게 쓸 수 있지만 글의 상황이나 마음을 충분히 혹은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한다.
아이스크림은? 맛있어요.
스테이크는? 맛있어요.
떡볶이는? 맛있어요.
아니, 아이스크림과 스테이크와 떡볶이가 같은 맛이란 말이야? 그것도 맛있는 맛?
아니오! 합창하듯 소리 높이고 나면 아이들은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채고 스스로 자주 쓰는 말들을 쏟아놓기 시작한다.
진짜, 정말, 너무, 많이.
우리는 진짜를 진짜 많이 써.
정말을 정말 많이 써.
너무를 너무 많이 써.
많이를 진짜 정말 너무 많이 써.
또 있어요, 선생님.
짜증 난다, 망했다도 있어요. 그리고, 그래서, 그런데도 있어요.
아이들이 불러주는 대로 화이트보드 한가득, 아이들은 제 노트에 스무 개쯤 써놓고 나면 “오늘 글 쓸 때 이거 쓰지 말라는 거 아니에요?” 알아채는 녀석이 나온다.
어휘력이 풍부하다는 것은 상황에 맞는 표현을 정확히 쓸 수 있다는 뜻이다. 좋은 문장은 상황, 감정, 생각을 명확히 보여준다. 정확한 단어가 필요하고, 정확한 단어가 제자리에 놓이면 적확해진다. 그러자면 품이 드니까 대충 가져다 놓아도 말이 되는 재밌다, 신난다, 짜증 난다 등을 쓴다. 그런 어휘를 한때 최대 몸 크기 자랑했던 공룡 낱말이라고 해보자. 공룡이 글이라는 무대 위에 등장할 수 있는 다양한 어휘를 모두 삼킨다면. 우리는 형편없이 초라한 낱말들을 가지고 글을 써야 하지 않을까. 진짜, 정말, 너무, 많이, 라는 부사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유의미한 정보값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구체적으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학년이 올라가도 표현이 자연스럽게 다양해지는 것은 아니다.
호랑이 선생님, 3학년
3학년 첫 수업이었다. 월요일과 금요일은 5교시, 화요일과 목요일은 6교시, 남은 수요일은 4교시다.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플 것 같고 힘들 거 같다. 입에서 ‘아이고’라는 소리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나올 거 같지만 애써 그 소리를 꾸욱 눌러서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하게 했다. 신발주머니를 넣고 교실로 들어갔다. 웬수가 짝이지만 서로 때려도 꿈쩍 안 하고 있다가 나랑 티격태격한다. 그래도 귀찮은 수학 시간에 짝이랑 작은 쪽지로 떠든다. 예를 들면,
‘4번 답 좀 알려줘.’
‘싫어.’
‘야!’
‘알았어.’
이렇게 말이다. 선생님이 우리한테 가까이 오면 그 쪽지는 작으니까 책상 서랍에 확 집어넣으면 된다. 그리고 내 새로운 친구는 김**, 오**, 이**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호랑이? 무섭지만 재미있고, 수업은 빡세고 아무나 발표시키지만 뭔가 머릿속으로 정리가 쉽게 되고, 계속 일인일역 하라고 잔소리를 팍팍 붓지만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반을 만들려고 애쓰신다. 그리고 제일 최악은, 3번 이상 친구가 하지 말라고 하는 행동을 하면 뒤로 나가고 우리 반 규칙에 어긋나게 행동하면 남아서 청소하는 것과 나머지 공부를 일주일 동안 해야 한다. (중략) 하지만 행동으로 설명해 주시고 먼저 해 보인다. 예를 들면 “이 미술 작품을 만들 건데 이것과 저것과… 이렇게 저렇게… 하면 돼요. 알겠죠?” 이렇게 말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셔서 좋다. 앞으로 재미있는 3학년이 될 것이다.
글쓰기 수업의 특성상 먼저 다 쓴 친구가 생긴다. 화이트보드에 자주 쓰는 단어를 적고, 나와서 나만의 표현으로 바꾸어 보도록 한다. 아이들은 자신만의 말로 표현하며 재미와 의미를 체감한다. 앉아 있는 녀석들은 보드마카 들고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은 친구들이 부러워 엉덩이가 들썩들썩한다. 조용히 기다려주기만 하면 다음과 같은 예문들이 나타난다. 커다란 입 벌리고 나의 어휘를 삼키는 공룡을 물리치고서.
다음은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본 것들이다.
친구들과 놀았다. 재밌었다. → 펄펄 날아다녔다.
놀이동산에 갔다. 신난다. → 오랜만에 머릿속을 비우고 놀았다.
치킨을 시켰다. 맛있다. → 군침이 나를 삼킨다.
친구가 나를 놀렸다. 짜증 난다. →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숙제를 안 했다. 망했다. → 엄마한테 죽었다.
뿅! 하고 나타나 뿅! 하고 사라지다, 5학년
어른들은 나에게 말한다. 사춘기가 왔다고. 나도 그것쯤은 안다. 누구나 한 번쯤 오는 사춘기! 우리 아빠는 항상 “사춘기네, 사춘기야.”라는 말에 덧붙여 “너는 여드름이 많이 날 거야.”라는 말을 밥먹듯이 한다. 그래도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Oh my god!”
코 왼쪽 옆에 여드름이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났다. 이럴 수가! 도저히 안 믿겨 볼도 꼬집어 보고 친구에게도 물어 재차 확인했지만 현실은 현실 드디어 내가 사춘기 늪에 깊게, 여드름 넝쿨에 꽁꽁 묶여버렸다.
나에게 여드름이 찾아오다니. 엄마, 아빠 말이 옐로카드가 되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너는 여드름 나면 쉬는 시간마다 세수해야 돼. 안 그럼 여드름이 얼굴을 뒤덮을 거야.’
(중략)
여드름을 생각하니 터덜터덜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진다. 수영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번쩍! 수영을 하고 집에 와서 잠이 들었는데 기억이 차마 나지 않는 꿈이 나를 깨운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짜증이 치밀어 저절로 여드름에 손이 올라갔다. 이럴 수가! 여드름이 뿅! 하고 사라졌다. 한마디로 여드름은 뿅! 하고 나를 찾아와 뿅! 하고 떠나버린 것이다. 두 번 다시 악몽 같은 여드름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재밌다, 신난다, 또 하고 싶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쓸 일이 없는 건 아닌지 한편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글쓰기 교실에 오는 날만이라도 재밌고 신나고 또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해서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뭔가 알아갈 때마다 짜릿했으면 좋겠다. 글쓰기 교실에 올 때 설렜으면 좋겠다.
수업을 마무리하며 각 반에서 공룡 낱말을 대신할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본다. 이해도를 확인하고 표현력도 기르기 위함이다. 여태까지 나온 아이디어를 보자면 식언(言) 낱말, 먹보 낱말, 이기적 낱말, 독재자 낱말 등이다. 표현하려고 하는 만큼 아이들 글에서 공룡은 점점 작아지고 사라진다. 아이들이 자신의 마음을 더 정확한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때 글은 한층 풍부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