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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람 Jan 31. 2022

#9 창업지원사업,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사업하라고 돈을 주는데 돈을 쓰려니 사업할 시간이 없다


한국에서 창업을 하면서 국가지원사업을 할지 말지, 한다면 어떤 사업에 지원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돈을 빌려준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준다는데 고민할 이유는 또 무언가 싶지만, 이게 생각처럼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국가지원사업, 특히 창업을 지원하는 사업을 만들어 내는 정책결정자들은 시작부터 명확한 원칙을 가지고 있다. 국가의 돈이란 결국 국민의 세금이고, 세금을 쓰는 이상 그 세금의 몇 배에서 몇십 배에 달하는 유무형적 편익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황금률이 그것이다.


그 편익이란 단순하게는 회사의 성장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고용의 창출도 있고, 경제발전에서 소외된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일일 수도 있으며, 국가권력이나 복지제도가 해결할 수 없는 사회문제를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일 수도 있고,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던 유휴 자원(ex. 에어비앤비와 빈 집)에 환금성을 부여해서 사회 전체적인 부와 풍요의 창출에 기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에어비앤비: 정책결정자들은 창업자를 지원하면 최소 이런 비즈니스 모델이 나올 거라 기대한다.

     

문제는 돈을 주는 쪽과 받는 쪽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국가지원사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다들 투철한 공공성으로 무장하고 '내가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을 받아쓰는 것이니 이것을 어떻게든 알뜰살뜰하게 써서 n x 100쯤 되는 사회적 편익을 창출하고 말겠어!'라는 정의로운 생각을 할 리는 없잖은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원사업이란 '구찌가 매우 큰 공돈’이고, 공돈이란 일단 내 주머니에 들어오면 어떻게든 써버리면 될, 내 돈인 것이다.


국가지원사업을 둘러싼 모든 부조리와 모순은 이 근본적인 입장 차이에서 생겨난다. 어떻게든 사익을 위해 돈을 쓰려는 개인과, 어떻게든 공익을 위해 돈이 쓰이게 하려는 국가권력 간의 쫓고 쫓기는 머리싸움의 장이 국가지원사업인 것이다.


뛰는 세금도둑 위에 나는 국가권력


단 한 번이라도 국가지원사업에 참여해본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이 돈 받자고 내가 이 짓들을 다 해야 돼?' 여기에서 말하는 '이 짓'에는 사업계획서 작성이나 PT 발표처럼 지극히 당연한 일도 있지만, 요새 젊은이들의 감각을 익히라며 '헐, 대박, 쩐다'를 크게 외치라는 교육을 듣는 일,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풍선 레크리에이션을 하며 방방 뛰는 일(a.k.a. 네트워킹 데이), 단돈 10만 원을 받기 위해 12가지의 문서를 첨부하여 제출하는 일, 같은 문서를 문구만 바꿔가며 30번 제출했다가 빠꾸먹기를 반복하는 일, 1원이 안 맞아서 세금계산서를 취소하고 보낸 돈을 환급받고 송금확인서를 재발급받는 일, 딱 한 번 쓰고 폐기할 신용카드를 발급받기 위해서 은행에 방문해 한 시간을 기다려 7개의 서류를 제출하는 일, 공유오피스에 매일 가서 출석체크를 하거나 수기로 업무일지를 쓰는 등 그야말로 '지원금 노동'이라 할만한 수백 가지 일들이 있다.


하지만 이토록 부조리해 보이는 하나하나의 의무에도 다 존재의 이유가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의무 하나당 수십, 수백 건의 문제 사례가 있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초창기의 국가지원사업 설계자들이 성선설을 믿고 러프하게 만들어놓은 지원사업의 허점을 악용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해 먹었을 것인가. 사업과 무관한 물건을 사들이거나, 그렇게 사들인 물건을 중고로 팔거나, 가족을 고용해서 인건비를 빼돌리거나, 하지도 않은 사업을 했다고 뻥치거나, ‘가라 계산서’를 받은 후 리베이트를 받거나, 지원금으로 해외여행을 가서 ‘탕진잼’을 즐기거나 하는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일어났던 것 같다.


내가 딱히 구체적 문제 사례를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국가지원사업마다 매년 갱신되는 운영지침을 살펴보면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다. 운영지침, 특히 사업비 항목은 대부분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리스트로 가득 차 있는데,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이건 되긴 하는데 이렇게만 해야 되고, 이렇게 할 때는 뭐가 필요하고, 저렇게 할 때는 언제까지 뭘 해야 하고... 건조하고 냉정하며 쪼잔하게 서술된 세부항목들을 보면 그 문장이 가리키는 세금도둑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그려볼 수 있다.


이처럼 국가지원사업은 받는 돈의 크기와 자율도, 그리고 해당 지원사업의 역사에 비례하는 양의 노동을 요구한다. 시기에 따라서는 거의 full-time job이 되는 이 역할은 결코 만만히 볼 일이 아니다. 위토피아는 처음부터 팀으로 시작했고, 민진하 대표는 기획과 영업, 나는 회계와 행정과 UI 디자인, CTO 이현은 개발을 분담해 맡았기 때문에 국가지원사업을 할 때에도 이 지원금 노동의 무게를 나누어 질 수 있었다. 사업계획서 작성은 모두가 함께 하고, 발표는 대표가, 각종 회계처리와 페이퍼워크는 내가, 사업의 본체인 플랫폼 개발은 CTO가 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나는 내일학교 시절 크고 작은 지원사업을 두세 번 하면서 나랏돈 쓰는 것의 무서움과 괴로움을 뼈저리게 체험했지만 우리와 달리 혈혈단신 지원사업의 세계에 뛰어든 다른 창업자들은... 모르기는 몰라도 아마 창업한 첫 해 동안 본업을 위해 쓴 시간보다 지원사업에서 요구하는 페이퍼워크를 하기 위해 쓴 시간이 더 많지 않았을까 싶다.


창업지원사업의 아이러니: 창업을 하라고 돈을 주는데 그돈을 쓰려니 사업할 시간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창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국가지원사업은 쳐다보지도 말고 본업에 충실하라거나 투자자를 찾아 나서라고 권하는 입장이냐고 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 처음에 예비창업패키지에서 요구하는 문서와 참여해야 하는 교육들이 너무 많아서 대표와 내가 ‘이거 괜히 했나...’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우리가 감자 몇 박스를 팔아야 이 지원금이 나오지...?’라고 계산해보고는 기꺼이 지원금 노동을 감내하기로 했다. 극초기 스타트업에게는 단비와 같은, 적게는 몇백만 원에서 많게는 일억에 가까운 돈을 그냥 주는 기회를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모든 것에서 잊지 말아야 할 원칙이 있다면... 국가지원사업은 복권이 아니라 나랏돈을 쓰는 대가로 나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정해진 만큼의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원사업에 선정된 기간 동안 반쯤 공무원이 되었다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것 아는 게 다. 공짜인 줄 알았는데 그 대가로 일을 해야 하면 화가 나지만, 원래 그렇다는 걸 알고 시작하면 덜 힘들 테니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창업지원사업에 참여하면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창업가 정신이 아니라 관료주의에 적응하는 방법인 것 같다. 형식이 실질보다 중요하고, 모든 것을 문서로 말해야 하며, 무언가에 도전해서 성공하는 것보다는 책잡히고 추궁당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낫다는 바로 그 복지부동의 자세 말이다.


하지만 결국 관료주의의 부조리와 모순조차도 대한민국에서 사업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배우고 익혀야 할 하나의 소양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국에서 관을 상대하지 않고 사업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국가기관의 기준에 맞는 회계정산 및 페이퍼워크 실력을 갖추는 것 역시, 사업에 도움이 되면 되었지 해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국가지원사업이란 창업의 세계에 뛰어드는 이들에게 처절하게 관의 프로토콜을 가르치는, 일종의 교양필수과목일지도 모르겠다. 내 인생 중 1년 동안의 시간과 노력과 고통과 인내를 수업료내고 말이다. 역시 세상에는 공짜가 없고, 국가지원사업도 예외는 아니다.





+ 그밖에 창업지원사업을 하면서 겪었던 여러가지 이야기를 웹툰과 함께 간단하게 정리해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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