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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람 Feb 14. 2022

#10 저도 저한테 이런 능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요

스타트업 창업 멤버를 하다 보면 발견하게 되는 것들

사람의 적성과 재능은 참으로 다양한데, 어떤 것들은 자기 자신도 그런 게 있는지 모르는 채 오랜 기간 숨겨져 있기도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선장이 되기에 딱 맞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평생 배를 타볼 일이 없다면,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적성을 모른 채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스타트업을 하는 것의 보람과 기쁨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어쩌면 가장 큰 리워드는 이처럼 그동안에는 몰랐던 나의 숨겨진 적성과 재능을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큰 조직에서 개인은 아주 작은 톱니바퀴로서 가장 잘하는, 혹은 맡겨진 일을 반복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스타트업은 조직의 특성상 소수의 인원으로 시작하고, 그 소수가 일당백으로 온갖 일들을 맡아서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그동안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사실 나는 내일학교 자람도우미 시절부터 이런 경험을 많이 했다. 내가 짓기와 농사를 좋아한다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뜻밖에도 나에게는 회계 적성이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내가 문과 성향이라고 생각했고(=책읽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니까), 그중에서도 경영이나 회계 같은 것은 나와는 무관한 세계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왠지 모르게 속물적이어서). 그런데 내일학교에서 회계 담당자가 없어서 공부를 하다 보니 뜻밖에도 내가 복식부기 장부기록을 매우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호하고 알 수 없게 존재하던 것을 정확히 숫자로서 정량적으로 기록하여 한눈에 파악하는 것에서 무한한 기쁨을 느꼈다. 이럴 수가. 나는 속물 중의 속물, 그것도 돈 계산에서 삶의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제대로 된 샤일록의 후계자였던 것이다!


돈 계산이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요


위토피아를 시작하면서도 나는 새로운 적성을 발견했다. 처음 창업을 하자고 마음먹었을 때 일단 모두 모여서 브레인스토밍을 하면서 어떤 플랫폼을 만들지 구상을 했고, 그렇게 나온 아이디어를 모아서 이미지로 만들어 서로 공유했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플랫폼의 상이 구체화되면서부터는 Adobe XD를 이용하여 UI를 만들었다. 구성원 대부분이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기 때문에 누가 하든 비슷한 결과가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UI를 만드는 것에도 특화된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디자인 업계에서는 ‘그리드 변태'라고 부르는, 오와 열이 딱 맞고, 좌우 비율이 일정하며, 모든 구성요소의 룩앤필이 일관되어야 비로소 마음의 평화가 오는 자들이 UI 작업에 딱 맞았다. 그리고 나는 생전 몰랐던 내 적성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1px이 안 맞으면 속이 울렁거리는 그리드 변태였다.


사실 작년 이맘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위토피아에서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하게 될 줄 몰랐다. UI를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플랫폼의 기획과 정체성, 타깃 고객에 대해서 대표와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실제로 그걸 구현하려고 하다 보니 CTO를 들들 볶게 되었고, 다른 경영진이 젊다 보니 상대적으로 늙은(=회사를 다녀본) 내가 행정처리와 회계처리를 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명함을 찍을 때쯤 되어서 정신 차려보니 내가 하는 일이 부대표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이것은 대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스타트업 대표가 뭐 폼나는 자리에서 투자심사역 만나고 무대 위에서 IR 하고 시원하게 법인카드나 긁어대는 일인 줄 아는데 내가 보기엔 스타트업 대표는 3D 중의 3D다. 특히 우리는 최초의 더미 데이터를 만들기 위해 판매자부터 섭외해야 했는데, 이것은 30분만 달려도 차창이 먼지로 뿌옇게 되는 시골길을 하루 종일 달려야 한다는 뜻이고, 수많은 퇴짜를 겪다가 몸빼 바지 입고 고추 모종을 심거나 사과를 따는 등의 노동을 함께 하며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뜻이며, 사무실 벽면의 페인트를 직접 칠하다가 몸살이 나도 새벽같이 출근해야 한다는 뜻에, 지원사업 심사며 교육으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빛의 속도로 사라져 가는 통장잔고와 거북이보다 느린 매출상승곡선을 보면서 불면의 밤을 뒤척이고, 그러면서 구성원들이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어떻게 하면 번아웃이 오지 않으면서 최대한의 효율을 내게 할지 밤낮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마도 스타트업 죽음의 계곡이라는 J 커브를 넘어 살아남은 스타트업의 대표란 전인적 능력을 갖춘, 일종의 초인에 매우 근접해지지 않을까 싶다.


스타트업의 이상과 현실: 대표가 되면 폼나게 무대 위에서 조명받는 일을 할 줄 알았더니만...


이 ‘강제 자기계발’은 CTO도 예외가 아닌 것이... 일단 좋든 싫든 풀스택 개발자가 되어야만 한다. 외주를 주려고 해도 뭘 알아야 줄 것인 데다가, 갑자기 로그인이 안 되거나 결제가 안 되거나 서버가 다운되거나 하여튼 뭔가 문제가 생기면 모두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CTO가 뭔가 신묘한 능력을 발휘하여 이 상황을 마법처럼 해결해 주겠지?’라며 본인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학생 인턴들을 데리고 있기 때문에 'Hello, World!'를 출력하는 것부터 깃허브 접속법, 개발문서 만드는 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하나하나 가르쳐야 하는 데다가, 자기 능력의 한계에 다다라 분한 마음에 울거나 멍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팀원의 정서적 케어까지 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된다. 기계처럼 개발만 하면 될 것 같지만 사실 결국 그것도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인사관리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그래서 실리콘밸리의 어느 기업에 말단 개발자로 들어갔더라면 살아있는 코딩 기계로 살 뻔했던 CTO는 본의 아니게 함께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신경 써야 하는 인격 수양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밖에도 극초기 스타트업에 참여하는 모든 구성원에게는 공무원 수준의 페이퍼워크가 가능해지는 부가기능이라든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길바닥에서 10초 안에 우리가 뭐하는 곳인지 설명할 수 있는 능력, 정수기 설치하러 온 기사님에게 물건을 파는 능력과 플랫폼의 버그를 나노 단위로 찾아내는 능력 등 소소한 재능이 생겨나곤 한다.


하지만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스타트업을 하면서 기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능력은, 도저히 앞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길을 만들어내는 문제해결 능력이 아닐까 싶다. ‘나 말고는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도, 어떻게 할지 물어볼 사람도 없다'라는 막막한 상황이 모두의 내면에 잠재된 능력을 거의 최대치로 끌어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을 하면서 맞닥뜨리는 문제에 비하면 정십이면체 큐브쯤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아예 10대 때부터 스타트업 시뮬레이션 또는 아예 창업을 시켜버리고 그에 필요한 배움의 과정을 거치게 하는 것이 청소년기에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이 아닐까 싶은데... 사실 2000년 초등대안학교 개교 때부터 창업 전문 대안학교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 준비를 하는 것에 근 이십 년 넘게 걸린 것이 지금 와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위토피아(Hooaah)에 전념하느라 내일학교 신입생을 받지 않고 있는 지금은, 우리가 유니콘으로 대박이 나서 다시 학교를 재개교할때 즈음 이 구상을 실천에 옮기는 도리밖에는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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